에스겔
2016.11.05 01:54

(101강) 측량을 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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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2:15-20http://onlycross.net/videos/eze/eze-42152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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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5.그가 안에 있는 성전 측량하기를 마친 후에 나를 데리고 동쪽을 향한 문의 길로 나가서 사방 담을 측량하는데

16.그가 측량하는 장대 곧 그 장대로 동쪽을 측량하니 오백 척이요

17.그 장대로 북쪽을 측량하니 오백 척이요

18.그 장대로 남쪽을 측량하니 오백 척이요

19.서쪽으로 돌이켜 그 장대로 측량하니 오백 척이라

20.그가 이같이 그 사방을 측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길이가 오백 척이며 너비가 오백 척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설교>

이사야서 49: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라는 말을 하고 5절에서도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7절에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신실하신 여호와 그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고 말하는데 1-7절까지의 말씀들은 ‘선택’과 ‘부르심’두 단어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선언처럼 하나님의 백성 됨은 선택과 부르심이라는 하나님의 독특하고도 신비스런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됨이 곧 구원과 연결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은 선택과 부르심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 외에 그 어떤 방식으로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이 증거 하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선택과 부르심을 독특하고도 신비스러운 방식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세상적 사고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도 수긍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이 인간의 외적 행위와 내적 성품 등을 보시고 결정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것입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세상적 사고와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태중에서부터 부르셨고 복중에서부터 이름을 기억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이 태중에서부터 이미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태중에서 결정된 선택과 부르심의 방식은 인간의 행위와 성품이 구원에 개입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행위는 물론이고 그 어떤 성품이나 인격이 형성되기 전의 선택과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아담 이후의 인간은 오직 죄의 본성을 가진 자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서는 그 어떤 행위와 성품도 선한 것으로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부르심이라는 방식으로만 구원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직시해야 할 분명한 사실은 우리에게서 어떤 행위가 있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뜻이 있었고 그 뜻에 의해 작정된 선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누이 강조한 것처럼 믿음의 방향이 결정되는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결코 소홀히 생각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선택과 부르심은 사도 바울이 야곱과 에서를 통해서 가르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롬 9:11절에 보면 이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된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아직 나지도 않고 행위도 없을 때 사랑하고 미워할 자로 구분되었다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에서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하지 않는가라는 의구심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에서보다는 야곱이 더 성품이 야비하고 나쁜 사람처럼 보입니다. 항상 속이는 쪽은 야곱이었고 에서는 속는 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아담 이후의 인간은 죄의 본질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그 행실이나 성품과는 무관하게 악한 존재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시각에서는 선한 것이라 해도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악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과 악은 ‘자기중심이냐 하나님 중심이냐’로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하나님 중심’을 외치긴 하지만 그것은 그냥 ‘우리 교회는 이렇게 신앙적입니다’를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 실제로는 모든 관심이 자신에게로 집중되어 있을 뿐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이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짐을 받아들이십니까? 단지 성경 이론이나 교리적 지식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왜 선택과 부르심이 아니면 구원 될 수 없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까지 여러분이 이해하셨고 받아들이신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굳이 선택과 부르심이란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구원하시는 그 뜻을 아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처럼 죄 아래 있는 세상을 심판해 버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원수 된 자들 속에서 자기 백성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그 뜻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길로 가는 백성 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완성의 의미로 나타난 새로운 성전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성전 전 지역의 바깥 둘레를 측량하는 것으로 성전 측량이 모두 마무리 되는데, 측량된 바깥 사방 둘레가 각기 오백 척이라고 합니다. 오백 척은 약 260미터쯤 된다고 하니 적지 않은 크기의 성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절에 보면 “그가 이같이 그 사방을 측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길이가 오백 척이며 너비가 오백 척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고 말합니다.

 

 

담의 역할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담이 있음으로 해서 거룩의 세계와 속된 세계가 구별되어 차단되어 있으며 따라서 혼합될 수도 교류할 수도 없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성전 밖의 세계는 속된 세계, 즉 부정한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담으로 인해 성전 안의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때문에 성전 안의 세계를 부정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상상을 따라 입맛에 맞는 성전 안의 세계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이것이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새로운 성전은 완성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솔로몬 성전에서 보지 못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의 완성이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정성을 보이는 일에 힘쓴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 신앙의 실패 이유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전으로 드러내고자 하신 하나님의 생각과 성전을 바라보는 인간의 생각이 달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성전을 통해서 자신의 실패를 깨닫고 대신 하나님이 홀로 이루시는 완성의 세계를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끝까지 하나님이 이루시는 완성의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함만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이 솔로몬 성전이 무너진 이유입니다.

 

 

이제 우리는 에스겔을 통해서 성전 안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전 안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홀로 이루시고 완성하신 은혜와 사랑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는 알 수 없고 볼 수도 없는 감추어진 신비의 세계가 무엇인가를 에스겔이 본 새로운 성전에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전 안의 세계는 애당초 인간의 힘으로 볼 수 없고 알 수 없습니다. 때문에 인간의 의지와 결단으로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에스겔도 자신이 성전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에스겔에게 임하여 그를 데리고 예루살렘 땅으로 가서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고 천사가 그를 데리고 성전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에스겔은 다만 이끌려 갔을 뿐입니다. 그리고 참된 성전의 내막을 보게 된 것입니다.

 

 

계 21:15-17절을 보면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 21:10절을 보면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계21장에 등장하는 성의 측량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측량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어린 양의 신부인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의미하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대한 측량을 천사의 측량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에 의해서 세워지고 완성된 참된 교회를 뜻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측량된 이 성의 사방이 오백척이라고 하는데 계시록에서는 만 이천 스다디온이라고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이것을 2,200킬로미터로 번역하였습니다. 어차피 실제로 존재하는 성전을 측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에스겔과 계시록의 서로 다른 크기에 대해서는 관심 둘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생각할 것은 계시록에서 측량한 것처럼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만 이천 스다디온이 되는 성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현실 세계와 어긋나는 비현실적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이 세우시고 완성하신 참된 성전의 세계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본문 20절에서 언급된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는 말씀은 비현실과 현실로 구분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은 현실의 시각으로는 볼 수 없고 알 수 없으며 이해할 수도 없는 비현실의 세계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밖은 눈에 보이고 알 수 있으며 얼마든지 이해가 되는 현실의 세계인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에스겔의 새로운 성전과 연결되어 있는 요한 계시록의 거룩한 성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비현실적 세계를 살아가는 것일까요 아니면 현실적 세계를 살아가는 것일까요? 답은 당연히 비현실적 세계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따라서 현실에 매이고 현실 속에서 인정받는 가치 있는 교회로 세워지고 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세우는 교회 아닌 교회일 뿐입니다.

 

 

성전 측량은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일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세상 끝날 까지 하나님의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 즉 그리스도의 신부된 몸 된 교회를 세상 끝날 까지 붙드시고 지키셨다가 하늘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누리는 영광이며 소망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몸 된 교회는 참된 영광을 알고 소망하기에 세상을 현실로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세상 속에 있되 세상이 비현실로 치부하는 보이지 않는 나라,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교회의 교회됨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현대 교회는 세상과 같은 길에서 세상이 인정하는 종교의 길로 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우시고 완성하신 몸 된 교회를 지키십니다. 그래서 말씀이 담이 되게 하셔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 작업을 계속 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 담이라면 그 담은 거룩의 세계를 보호함과 동시에 속된 것이 거룩을 침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계시록에서 측량된 거룩한 성의 규모에서 더욱 실감할 수 있습니다. 성의 길이와 폭과 높이가 각각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고 성곽이 백사십사 규빗(약 65미터)라면 누구도 성문이 열리지 않는 이상 자신의 힘으로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을 계 21:26-27절에서는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고 말합니다.

 

 

거룩한 성은 어린 양의 생명책이 이름이 기록된 자들만 들어갑니다.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개인의 공로나 업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과 부르심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에게서는 자기 공로와 업적을 내세우는 자랑이 없습니다. 다만 죄인 된 자신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피 흘리고 죽으신 어린양의 피로 인해 감사할 뿐입니다. 이것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성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누구나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선악과를 먹은 죄인임을 알고 뼛속까지 죄로 가득한 자신에게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음을 자각하며 예수님이 행하신 의로움만 높이는 것이 곧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부인된 자가 아니고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 백성을 자기부인이라는 방향으로 끌어가십니다. 결코 세상에서의 영광과 자랑으로 끌어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선택과 부르심이라는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붙들린 신자의 인생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인생을 바라고 신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같이 세상에서의 자기 현실에 집착할 뿐입니다. 이러한 세상에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거부의 대상일 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말은 하지만 그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영광은 자신이 잘 되고 나아지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현실이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지극히 자기중심적 사고에 붙들려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속된 것입니다.

 

 

계 21:22-23절에 보면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고 말합니다.

 

 

성안에 성전을 보지 못하였다는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에는 당연히 성전이 있어야 하는데 성전이 없다는 것은 어린양이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사람이 자신의 손으로 행한 그 어떤 일도 거룩한 성으로부터 거부된다는 뜻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린 양이 성전이시고 하나님의 영광이고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영이 빛이시기 때문에 해와 달의 비췸도 쓸 데 없는 세계인데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빛의 행함이라며 내어 놓겠습니까? 다만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만 높이고 자랑할 뿐입니다.

 

 

에스겔이 본 새로운 성전에 솔로몬 성전의 것들이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에서 사람의 손으로 행한 모든 일의 실패를 보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실패한 인간이 성전 안에 있게 되는 것은 어린양의 피가 우리의 죄를 덮고 거룩한 자리에 있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고 사랑이며 자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을 드러내기 위해 일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자기 고집으로 내가 원한 길로만 가려고 하고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뜻에도 관심 없이 세상만을 현실로 여기고 살아온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내세워서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어떻게 일해 오셨는가를 증거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에 의해 살아가는 인생이 된 것 자체를 복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인생의 현실입니다. 즉 신자 된 여러분의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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