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11.12 16:47

(102강) 성전의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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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3:1-5http://onlycross.net/videos/eze/eze-430105.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

2.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 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3.그 모양이 내가 본 환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환상 같고 그발 강 가에서 보던 환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

4.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5.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

 

<설교>

사람들에겐 저마다 꿈이 있으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일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꿈의 성취를 위해 신을 찾는데 이들을 가리켜서 종교인이라고 합니다. 이들 종교인은 굳이 꿈의 성취만이 아니라 불확실하고 불안전한 시대에서 삶을 보호 받기 위해서도 신을 부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종교라고 합니다.

 

 

한국어 사전에서는 종교를 “1.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 2.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과 같은 원시 종교를 포함하여,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교 등과 같은 세계 종교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가 있다”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애니미즘은 “모든 사물에 생명이 있는 것으로 보고 인간처럼 생각과 느낌이 존재한다고 믿는 신앙”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특이하고 거대한 바위나 아주 오래된 거목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신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토테미즘은 “자기 부족의 기원을 특정한 동, 식물과 연결시키는 신앙”입니다. 곰이나 호랑이 등과 같은 동물이나 주위의 식물들을 신으로 모시고 숭배하고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한국어 사전에는 언급을 하지 않지만 샤머니즘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샤머니즘은 “인간과 하늘을 연결시켜주고 인간의 소망을 전하고 행복을 전해주는 '무당'과 그 주술을 믿는 신앙”이며 현대 사회에서도 존재하고 활동하는 무당이나 점술가들을 생각하면 됩니다. 이 모두를 하나로 묶어서 ‘원시종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전에서 종교의 범주에 기독교를 포함시키고 있는 것은 세상이 기독교를 종교의 한 형태로 인식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께 누누이 말씀드린 것처럼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 말은 기독교의 참된 신앙은 종교 세계의 흐름과 그 맥을 같이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기독교가 종교의 범주에 속하지 않음을 받아들이신다면 여러분은 현대 사회 속에 팽배한 종교세계의 흐름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져 가는 현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 사회 속에 팽배한 종교 세계를 보지 못하면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기독교와 종교의 다름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곧 현대 사회 속에 팽배한 종교 세계를 볼 수 있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져 가는 현재를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다스리고 이루어 가시는 현재를 보지 못하고, 종교세계 또한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자기 신앙의 오류 또한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만 생각합니다. 성경을 왜곡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 또한 분별하지 못하고 목사가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종교일 뿐이며 종교를 신앙으로 착각하게 하여 자신이 하나님을 신앙하고 있다는 고정관념에 붙들리게 하는 것이 사탄의 계획이며 활동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활동을 기독교가 이단이나 사이비로 규정한 단체나 우상을 섬기는 종교로 여기는 불교나 이슬람, 그리고 무당과 같은 미신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사탄의 활동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인이 신앙으로 여기는 것을 이용하여 종교로 끌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앙의 세계와 함께 종교의 세계가 무엇인가를 보지 못하면 종교의 길을 가면서도 신앙의 길에 서 있다는 착각에 붙들릴 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의 실상이며 오늘 현대 교회의 실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보여준 새로운 성전은 한마디로 말해서 종교 세계의 실패를 보여줌과 함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보게 합니다. 종교 세계의 실패는 무너진 솔로몬 성전이 새로운 성전에 있는 것으로 보여주며 참된 신앙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43장부터 언급되는 성전에 대한 내용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43장은 성전에 대한 모든 측량을 마친 후에 천사가 에스겔을 데리고 동쪽을 향한 문에 이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1절). 에스겔은 성전의 동문에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와서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영이 에스겔을 들어 안뜰로 들어갔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한 것을 보게 됩니다.

 

 

에스겔의 이 이야기는 단지 에스겔 개인의 신앙체험이 아닙니다. 만약 이것이 에스겔 개인이 체험한 간증과 같은 것이라면 성경은 우리와는 상관없고 우리가 체험할 수도 없는 허상 속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그러한 느낌을 많이 받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와는 무관한 내용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생각할 것은 에스겔은 하나님이 동쪽에서부터 와서 동문을 통해 성전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목격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하나님이 성전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돌아오신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성전으로 돌아오셨다면 그것은 성전을 떠나신 적이 있음을 전제합니다.

 

 

겔 10:18,19절을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내 눈 앞의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함께 하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 그룹들 위에 머물고 그룹들은 다시 이동하여 동문에 머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에서부터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무르고”(겔 11:23절)라고 말한 것을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해서 떠나 동쪽 산에 머무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동문을 통해서 떠난 영광이 다시 동쪽으로부터 와서 동문으로 들어가 성전이 여호와의 영광으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성전에는 문이 동문, 북문, 남문 이렇게 세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문은 그 모양과 크기가 모두 동일합니다. 그런데 왜 굳이 영광이 동문으로 떠났다고 다시 동문으로 돌아오는 것일까요? 이것은 동문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뜻이고 그것은 창세기를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창 3:24절을 보면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동쪽에는 생명나무의 길이 있는데 그 길이 그룹과 불 칼로 막혀 있습니다. 생명나무의 길을 막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누구를 막기 위해서입니까? 당시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담과 하와 두 사람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은 모든 자에게 해당되는 조치입니다.

 

 

따라서 아담에게 속한 모든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존재임을 생각한다면 생명나무의 길을 막으신 것은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한 조치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으로 누구든 생명나무의 길로 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갖게 된 생각은 선을 행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선악체계라고 합니다. 선을 행하기를 힘쓰고 성품과 행실을 고쳐서 만인에게 칭찬을 받는 수준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이 그러한 자신을 기뻐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생명나무의 길이 막혔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자기의 선으로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인간의 종교에는 저마다 선으로 규정된 것이 있습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신에게 제사하기 위해 아이를 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신을 섬기는 최고의 선으로 여겼습니다. 그처럼 자기의 선으로 구원을 받고 시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솔로몬 성전에서 율법을 따라 행했던 모든 것들도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는 최선이었고 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행위가 하나님께 인정되었습니까? 그들의 행위가 선한 것으로 인정되었다면 솔로몬 성전은 무너지지 않았어야 합니다.

 

 

지금의 기독교 역시 선으로 인정되는 행위들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헌금하고 구제하고 전도 하는 등의 행위를 신앙의 참된 행위로 여깁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이러한 행위에 열심이 있다면 그것으로 신앙은 성공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행위가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수단으로 하여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하는 인간의 사고방식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선한 행위를 실천함으로써 타인보다 신앙의 질이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선악체계입니다. 바로 이러한 선악체계가 생명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룹과 불 칼을 두신 것입니다.

 

 

결국 선악체계에 붙들린 인간의 사고방식은 ‘선은 인간의 행위로 나온다’는 것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즉 선을 행위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선으로 인정하지 않게 되는 이것을 가리켜서 육의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이 막혀 있던 동쪽으로부터 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행위와도 무관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자기 편한 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특히 찬송 부를 때나 예배할 때 ‘박수로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은 도외시하고 인간들끼리 종교놀이라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행위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2절을 보면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 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다는 것은 계 1:15, 계 14:2, 계 19:6절에서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많은 물소리와 같은 것으로 말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많은 물소리가 무엇인가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많은 물소리를 듣고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들었다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파헤쳐보면 죄다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내용들입니다. 또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또한 성경을 자기중심에서 자구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해도 우리는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누구 하나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것을 두고 많은 물소리와 같다고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3절을 보면 “그 모양이 내가 본 환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환상 같고 그발 강 가에서 보던 환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라고 말합니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는 분으로 함께 하실 것을 상상하고 기대합니다. 누구도 자신을 멸하기 위해 오시는 하나님으로 생각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동쪽에서 오시는 하나님의 모양을 예루살렘 성읍을 멸하러 올 때 보던 환상으로 봅니다. 다시 말해서 동쪽으로부터 오시는 하나님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과 생각지도 못한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선악체계에 붙들린 육의 세계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세계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자기들 좋을 대로, 자기에게 만족이 되는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명목으로는 신앙생활을 한다 해도 자기를 위한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실패고 멸망이라는 것을 예루살렘을 말하게 하심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며 이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그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신자입니다.

 

 

4-5절을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해 성전에 들어감으로 성전에 영광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 성전에는 우리가 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행함과는 무관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여호와의 모양을 성읍을 멸하러 올 대에 보던 환상 같다고 합니다. 이 말은 여호와 앞에서 모든 인간은 멸망 받아야 할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고 복을 주어 모든 일을 원하는 대로 잘 되게 하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이고 음성도 듣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생각하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결국 종교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전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성전에 들어가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신자 안에 계심으로 신자를 성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 14:20절에서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전 3:16절에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신자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우리 안에서는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바로 자기의 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행위로도 생명으로 나아갈 수 없는 죽은 존재임을 알게 됨으로 자기 행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그 행위에만 마음을 두게 됩니다. 예수님의 행위가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시고 생명으로 이끌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면 영광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그 영광은 죄를 보게 되면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만을 높이고 자랑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따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실천, 행위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세계는 이러한 신앙세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신을 믿는 인간으로서 행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신이 기뻐하는 선한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종교세계의 시각으로는 성령으로 인해서 죄를 알게 되고 그 죄가 예수의 피로 용서된 것으로 감사하는 신앙 세계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육의 세계는 영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본래 육에 붙들린 자였지만 동쪽에서부터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 안에 함께 하심으로 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의 사람이 되었기에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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