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11.19 15:27

(103강) 성전의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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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3:6-12http://onlycross.net/videos/eze/eze-43061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6.성전에서 내게 하는 말을 내가 듣고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내 곁에 서 있더라

7.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에 영원히 있을 곳이라 이스라엘 족속 곧 그들과 그들의 왕들이 음행하며 그 죽은 왕들의 시체로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8.그들이 그 문지방을 내 문지방 곁에 두며 그 문설주를 내 문설주 곁에 두어서 그들과 나 사이에 겨우 한 담이 막히게 하였고 또 그 행하는 가증한 일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노하여 멸망시켰거니와

9.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거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 가운데에 영원히 살리라

10.인자야 너는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이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

11.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성전의 제도와 구조와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그들로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

12.성전의 법은 이러하니라 산 꼭대기 지점의 주위는 지극히 거룩하리라 성전의 법은 이러하니라

 

 

<설교>

신자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교훈적 가르침을 깨닫고 실천하여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약 성경을 교훈적 가르침으로 접근한다면 그는 성경을 모른 사람일 뿐 아니라 하나님도 알지 못한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삶에 있어서 교훈이 되는 말씀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훈은 인간으로서 현재보다 더 나은 인격의 존재가 되기에 도움이 되는 조언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교훈은 인간의 행동과 삶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성경에서 그러한 교훈을 접하고 계십니까? 그러하다면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은 성경을 알지 못하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성경에는 교훈이라고 하기에는 낫 뜨겁고 부적절한 내용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도무지 도덕적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이 가득합니다. 특히 이스라엘 역사가 전부인 구약 성경에 오늘날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교훈적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는 것 때문에 동생 아벨을 살해한 가인의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으며, 창녀로 변장해서 시아버지인 유다와 동침한 다말 이야기에서는 또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까?

 

 

성경에는 교훈이 없습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오실 예수님을 예언하고 있고 신약 성경은 예언대로 오신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게 함으로써 인간이 상상하는 하나님을 무너뜨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영광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며 믿음으로 인도해 가는 것이 성경이 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스라엘이 멸망 받고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이스라엘처럼 우상 섬기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믿어야 할까요?

 

 

물론 우상을 섬기면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이 그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섬겼던 우상이 바로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멸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나도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며 믿는 것이며 행하는 것이 됩니다. 흔히들 생각하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 교회가 말하는 실천들이 전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라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사모하며 듣기를 원하기에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기도하게 되고 십자가의 정신을 따라서 구제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의 피로 확증된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발생하게 되는 것이지 우리의 의지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주지해야 합니다. 지금의 교회가 바로 이 점을 놓치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와 열심에 의한 행함으로 강조하면서 신앙의 유무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우리가 믿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에스겔이 이상 중에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을 본 것이 사실이다’는 것을 믿어야 할까요?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우리에게 ‘제발 믿어 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서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믿고 순종할 자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발적 의지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임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으로 보여주시는 믿음의 세계와 인간이 생각하는 믿음의 세계가 다른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믿음의 세계에는 인간이 있습니다. 인간의 열심과 정성과 실천이 있고 하나님은 그에 대해 상으로 복을 내리기도 하고 벌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항상 신자 된 자신이 어떻게 행하고 살아가는가에 매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의 말씀처럼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감으로 성전은 영광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 성전으로 하나님의 영이 에스겔을 데리고 들어가고 에스겔은 성전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7절을 보면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에 영원히 있을 곳이라 이스라엘 족속 곧 그들과 그들의 왕들이 음행하며 그 죽은 왕들의 시체로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처소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있을 처소를 만드시는데 그것이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자기 사랑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처소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둘 처소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처소는 하늘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하늘에서 세상을 살피시며 자기를 믿고 섬기는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며 힘들고 어려울 때 도와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기 위해 처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유도 필요성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과 같은 내용은 신앙생활을 위해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자신이 원하는 삶에 목적을 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솔로몬 성전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성전을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함께 하시기 위한 처소의 개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계시는 고정된 공간, 장소로만 바라봤습니다. 때문에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께 자신들의 열심과 정성을 보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며 복 주시는 것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을 세우게 하신 하나님의 취지와 맞지 않았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성전이 무너진 것입니다.

 

 

엡 2:20-22절에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예수 안에 있게 하신 목적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거할 처소가 되어라’고 말씀하시고 인간이 그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힘쓰면 될 것 같은데 왜 굳이 그 처소를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일에 인간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사탄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은 후에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존재로 전락되면서 자신을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보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누려야 할 자신의 몸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성전을 세운 것도 자신의 몸을 위해 하나님을 자기 곁에 두고자 하는 발상이었을 뿐입니다.

 

 

지금의 기독교도 이러한 의도로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몸을 위해 하나님을 자기 곁에 붙들어 두고 자신을 위해 일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는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잘하면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고 원하는 소원을 이뤄주시고 모든 일이 잘되는 길로 인도해 주신다고 믿는 것이 오해인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이 함께 할 처소가 되지 못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로 인해 더러워진 인간에게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는 불의하고 더러운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잘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실 거룩한 처소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처소인 것과 처소가 아닌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궁극적으로 영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은 인간은 죄로 인한 죽음의 모습 그대로일 뿐입니다. 죄로 인하여 생명의 길로 갈 수 없기에 죽음의 상태 그대로 존재하다가 영원한 죽음에 들어가게 됩니다.

 

 

‘나는 평생 교회를 다녔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라는 자기주장은 무의미합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믿은 최고의 증거가 교회를 다닌 것이지만 하나님은 교회 다닌 것을 믿음의 증거로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성전 신앙과 같을 뿐입니다. ‘우리가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께 제물 바치며 제사했지 않습니까?’라며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죽은 왕들의 시체로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는 이스라엘이 죽은 왕들의 시체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혀 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짐작컨대 당시 왕들이 자기를 위해 산당에서 우상을 섬겼고 죽은 후에도 성전 옆의 동산에 묻힌 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죽은 왕들의 시체란 말 자체가 자기를 위해 우상을 섬기고 성전조차도 자신을 위해 신을 찾는 곳으로 이용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 죄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10,11절에 “인자야 너는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이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 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성전의 제도와 구조와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그들로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보인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였을 때 나타나야 할 반응은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드러내고 죄악을 보게 한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성전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하실 일에 대한 것이고, 예수님을 만난 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을 때 나타날 수밖에 없는 반응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죄악의 부끄러움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영원히 있기 위한 처소가 무엇 때문에 죄악을 드러내고 죄악을 보게 하며 부끄러워하게 하는 것일까요? 가장 먼저는 자기 죄악을 보게 됨으로써 나 같은 자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위해 처소를 만드시는 은혜와 사랑을 알게 됩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없는 죄악의 존재에게 함께 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성전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일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며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자기의 의를 드러낼 수 없게 합니다. 결국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교하면서 느끼는 어려움이 이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이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고 부끄러운 자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것이 제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일은 저의 영역이 아닙니다. 저의 설교로는 불가능하며 말씀이 여러분에게 역사함으로 가능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자기 죄악을 알고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곧 말씀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 곧 복음은 사람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이 거부할 것을 염려하여 복음을 조금 순화시키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복음은 복음 스스로 활동하며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백성들에게는 반드시 역사하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이 되는 결과로 완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음을 믿는다면 신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존재하면 됩니다. 그리고 목사는 하나님의 뜻만 전달하면 됩니다. 이것이 참된 선지자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 전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는 하나님의 뜻이 그 마음에 박혀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마음에 박혀 있다면 자신의 죄악을 알지 못하고 부끄러움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도 땅의 것으로 판단하고자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고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저주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성전의 법은 이러하니라 산 꼭대기 지점의 주위는 지극히 거룩하리라 성전의 법은 이러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성전의 법은 성전이 세워진 산꼭대기 지점의 주위는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전이 세워진 곳의 주위가 성전으로 인해서 거룩의 혜택을 입게 된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행했는가와 무관하게 오로지 성전으로 인해 거룩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전의 법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의 법을 지켜 행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성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처소가 되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음을 믿으며 우리의 행함과 실천을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겔 37:26-28절을 보면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 가운데에 있으리니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을 열국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누구도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를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신자는 자기의 죄악으로 인해 부끄러워하며 상한심령으로 주께 나오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제사이고 이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롬 8:1-2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전의 법입니다. 그리고 이 법을 지켜 행하는 것은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전의 법은 곧 새 언약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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