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11.26 17:37

(104강) 즐겁게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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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3:18-27http://onlycross.net/videos/eze/eze-43182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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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 제단을 만드는 날에 그 위에 번제를 드리며 피를 뿌리는 규례는 이러하니라

19.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를 가까이 하여 내게 수종드는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에게 너는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를 주어 속죄제물을 삼되

20.네가 그 피를 가져다가 제단의 네 뿔과 아래층 네 모퉁이와 사방 가장자리에 발라 속죄하여 제단을 정결하게 하고

21.그 속죄제물의 수송아지를 가져다가 성전의 정한 처소 곧 성소 밖에서 불사를지며

22.다음 날에는 흠 없는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삼아 드려서 그 제단을 정결하게 하기를 수송아지로 정결하게 함과 같이 하고

23.정결하게 하기를 마친 후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떼 가운데에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를 드리되

24.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25.칠 일 동안은 매일 염소 한 마리를 갖추어 속죄제물을 삼고 또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와 떼 가운데에서 숫양 한 마리를 흠 없는 것으로 갖출 것이며

26.이같이 칠 일 동안 제단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려 정결하게 하며 드릴 것이요

27.이 모든 날이 찬 후 제팔일과 그 다음에는 제사장이 제단 위에서 너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즐겁게 받으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설교>

죄만 있는 세상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지나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이 단지 택한 백성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셔서 구원을 얻게 하고자 하기 위해서라면 하늘에서 음성으로 예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믿게 하시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 계시다는 것은 보내신 분이 목적하신 바가 따로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세상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로 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와 같은 몸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몸은 세상으로부터 환영 받지 못했고 오히려 고난 받고 피 흘려 죽으시는 몸으로 증거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몸은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 하늘로 가셨습니다.

 

 

고전 6:14-15절을 보면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면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와 무관하지 않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다시 살리실 것을 그리스도의 몸을 다시 살리신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우리의 몸을 다시 살리신다는 것은 우리의 몸을 죽은 몸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살리신다는 것은 죽었음을 전제합니다. 즉 죽은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관계에 있게 됨으로 해서 다시 살리심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죽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몸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죽음의 흔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것은 몸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몸으로 오셨다는 것은 우리의 몸이 죽은 몸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죽은 몸이 다시 살 수 있는 길은 실제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의 관계에 머무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 몸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몸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내가 내 몸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내 몸에 복을 내려주실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이 곧 창녀의 지체를 만드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 몸으로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함으로써 복을 받는 것에 관심을 둡니다. 자신의 몸이 죽은 몸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 외에 그 어떤 몸도 받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라면 자신의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내 몸으로 행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그 몸으로 행하신 일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몸이 죄의 몸이며 죽은 몸일 뿐임을 알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고 거듭났다고 해서 역시 몸이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거룩한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고 성령을 받아도 몸은 죽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은 죄 아래 있는 몸의 실상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믿게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이 자신의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받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이 자신을 받으신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혜 때문임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제단과 제사장과 제물이 등장합니다. 이 모든 것은 제사를 위한 것이고 솔로몬의 성전에서 필요하고 행해지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세우신 새로운 성전에 또 다시 솔로몬 성전의 것이 등장하는 것일까요?

 

 

18절을 보면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 제단을 만드는 날에 그 위에 번제를 드리며 피를 뿌리는 규례는 이러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것처럼 본문은 제사와 연관된 하나님의 규례입니다. 문제는 무엇 때문에 솔로몬 성전에서나 필요할 것 같은 제사규례가 새로운 성전에서 다시 등장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또 다시 제사가 시행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솔로몬 성전이 그대로 존속해도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성전을 보여주시고 천사로 하여금 측량하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후에 에스겔에게 보여준 성전을 그대로 건축하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제단과 제물과 제사에 대한 규례 또한 그대로 시행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성전이 실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제사 규례가 시행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제사가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제사를 시행하는 것이 죄를 용서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을 유지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이들의 성전 신앙입니다. 이러한 성전신앙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몸으로 열심히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시행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전 신앙에서 크게 오해되고 있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 제사를 시행하면 자신의 죄가 용서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으면 죄를 용서 받는다’는 생각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른 믿음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자신의 몸에 관심을 둔 자신을 위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신앙의 문제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20절을 보면 “네가 그 피를 가져다가 제단의 네 뿔과 아래층 네 모퉁이와 사방 가장자리에 발라 속죄하여 제단을 정결하게 하고”라고 말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성전 신앙에서의 제사는 제사하는 본인의 죄사함을 목적으로 합니다. 제사가 자신의 죄를 용서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20절에서는 제물의 피를 제단의 뿔과 제단 아래에 발라 속죄하여 제단을 정결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제물의 피를 제단에 바르는 행위가 제단의 정결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22절도 보면 “다음 날에는 흠 없는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삼아 드려서 그 제단을 정결하게 하기를 수송아지로 정결하게 함과 같이 하고”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26절에서 “이같이 칠 일 동안 제단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려 정결하게 하며 드릴 것이요”라고 말함으로 모든 제사가 제사를 행하는 자의 죄 사함이 아니라 제단의 정결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분명해지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이 행하는 제사를 받고 죄를 용서해주는 분이 아니란 것입니다. 제사 규례 또한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기 위한 장치로 세우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이 제사를 행함으로 자신의 죄가 용서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결국 인간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하나님께 나오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찾는 종교인의 실상인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죽은 몸으로 존재합니다. 죽은 몸이 제사를 행했다고 해서 산 몸으로 교체 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행한다 해도 죽은 몸은 죽은 몸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잘못은 자신들이 죽은 몸이라는 것을 모른 것이고, 죽은 몸으로 하나님께 나오지 않은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자로 제사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그들의 잘못이며 지금 우리의 잘못이기도 합니다.

 

 

제단 위에서는 번제가 드려지고 제물의 피가 뿌려집니다. 그로 인해 제단이 정결하게 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제단과 번제와 제물의 피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정결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결, 즉 거룩이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결, 거룩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누구든 예수님의 피를 믿는 자가 곧 거룩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몸으로 무엇을 행한다 해도 거룩과는 무관하며 죽은 몸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몸으로 행한 것이 자랑의 조건이 될 수 없고 서로의 행함을 비교하며 믿음의 여부를 판단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종합해서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의 새로운 성전에서 제사 규례가 언급되는 것은 인간의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규례의 완성, 즉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성전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전의 모든 규례가 완성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곧 거룩의 세계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완성되었기에 인간의 행함이 요구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님이 이루신 피의 세계를 믿을 뿐이고 그것으로 거룩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27절에서 “이 모든 날이 찬 후 제팔일과 그 다음에는 제사장이 제단 위에서 너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즐겁게 받으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죽은 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받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내가 너희를 즐겁게 받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즐겁게 받으시는 이유는 제사장이 정결한 제단 위에서 우리의 번제와 감사제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제사가 아니라 제사장의 제사로 인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즐겁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스스로 제물이 되셔서 제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완성되어 드러난 것입니다.

 

 

이 내용들은 19절의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를 가까이 하여 내게 수종드는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에게 너는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를 주어 속죄제물을 삼되”라는 말씀에서도 드러납니다.

 

 

여기 보면 제사장을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본래 제사장은 아론의 자손 레위 사람으로 언급됩니다. 왜냐하면 제사장 직분의 기원은 아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론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이 아닌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제사 규례가 솔로몬 성전의 제사 규례의 연장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9절은 하나님이 아론의 자손이 아닌 사독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이루시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아론의 자손이 아니고 사독의 자손일까요? 그것은 사독이 다윗 시대의 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아래 있습니다. 다윗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됩니다. 그렇게 보면 사독 자손의 제사장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이루신다는 것은 이 모든 일이 인간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분명 무너지고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새로운 성전에서 다시 등장하여 언급됩니다. 제사제도와 제물에 대한 규례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했습니까? 솔로몬 성전은 폐지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솔로몬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율법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성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죄는 성전에서 몸으로 뭔가를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언약을 믿지 않기에 자신의 몸으로 뭔가를 행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에서 벗어나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것이고 몸의 죽음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증거하는 것은 인간은 죄인이고 죽은 몸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약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언약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믿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성전이 있고 성전에서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 제사하며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 의해 죽으셨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언약의 성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분을 믿는 것임을 몰랐습니다. 자신은 죽은 몸이며 그 몸으로 지옥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서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요 7:19)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의 손으로 지킬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또한 이해할 수 없게 되고 십자가를 믿는다는 믿음 또한 믿음이 아닌 것으로 부정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합니다. 오늘 본문도 성전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요구를 모두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사장의 일, 제사법, 제물의 피,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 오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참된 성전이시고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그 손으로 뭔가를 행해야 하거나 몸으로 이루어야 할 일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자기 손으로 몸으로 반드시 행하고 이루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종교의 세계에서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모든 것을 이룸으로 신의 마음을 흡족하게 기쁘게 한 것이 없으며 단지 그것을 믿음으로 거룩에 참여하게 되고 구원받는다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믿음을 핑계 삼아 자기 행함을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함은 믿음에 의해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만 믿음에 의한 행함을 언급하는 것은 그러한 행함을 실천하라는 뜻이 아니라 종교의 세계에서 주장하는 믿음이 믿음이 아님을 증거 하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또한 종교의 세계에서 인정하는 행함이 행함이 아님을 증거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된 믿음의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은 우리의 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즐겁게 받으십니다. 따라서 죽은 몸으로 존재하는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로 존재하는 것이야 말로 무한한 은혜이며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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