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3.05.30 09:23

(95강) 하늘로 올리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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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6:19-20

마가복음 강해 누락된 부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속 계시지 않고 하늘로 가십니다. 죽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예수님을 죽인 자들에게는 두려움이 될 수 있는 일인데, 그렇다면 세상에 계속 남아 계시면서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파하시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자신들이 죽인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으로 세상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게 되고, 무엇보다 죄를 회개하면서 예수님을 주로 믿게 된다면 예수님이 세상에 계속 남아 계시는 것도 나쁠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 보면 장로들과 대제사장이 예수님이 부활해서 시체가 무덤에 없다는 말을 듣자 무덤을 지키는 군병들에게 돈을 주고 시체를 도둑질 해갔다고 하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감추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는다고 해서 제자들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고, 세상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또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자신들의 죄를 감추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늘로 가심은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세상에 남아 계시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십자가 사건이 자신들에게 어떤 의미의 사건인가를 깨닫게 되고 그렇게 구원 받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분으로 세상에 계속 존재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구원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로 결정되는 방식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셨을 때도 제자들은 믿음의 길을 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안 계신 상태라면 믿음과는 더욱 멀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는 자로 뒤바뀝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후에 오신 성령이 제자들을 이끌어 간 결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하늘이라는 곳은 과연 어떤 곳일까요? 우리는 하늘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늘에 관심을 둘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은 예수님이 가신 것이 전부가 아니라 장차 신자가 거할 본향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계 11:12절을 보면 “하늘로부터 은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신자는 하늘로 올라가서 그 곳에서 영원히 살 사람입니다. 이 세상 말고 신자가 영원히 거할 다른 세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는 것과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일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하여 잘 사는 것을 원합니다. 천국을 말하면서도 우리 속에는 세상을 향한 기대가 있습니다. 복음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그 기대를 포기하지 않고 버리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세상을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 그곳이 바로 예수님이 가신 하늘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하늘로 올리우고자 하시는 계획과 뜻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대해서는 눈을 감은 채 자신들이 만든 계획과 뜻을 내세우면서 그대로 이뤄달라는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늘로 가는 것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되어질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 앞에 준비되어 있는 참된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 살면서 하늘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신자 됨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올라가신 하늘은 장소적인 의미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늘 공간 어딘가에 예수님이 가신 하늘나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늘이라는 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파란 하늘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나라라는 의미에서 하늘인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하늘이 어떤 곳인가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하늘나라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은 예수님을 얼마나 마음에 두고 사는가를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마음을 두지 않고 있고, 십자가의 은혜에도 관심이 없다면 자연히 예수님이 계신 하늘나라에도 관심이 없게 됩니다. 오직 보이는 세상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마음에 살아계시고 십자가의 은혜를 안다면 자연히 예수님이 계신 하늘나라에 마음이 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간혹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하늘나라를 구체적으로 보고 확인을 하게 되면 자연히 하늘나라에 마음을 두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여줘서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식이고 자기 확신입니다.

 

자신이 보고 확인을 해서 믿는 것이라면 굳이 믿음을 선물로 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성령이 오실 이유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보여주면 되기 때문입니다. 천국도 보여주고 지옥도 보여줌으로써 예수를 믿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준다면 누구라도 예수를 믿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을 위한 믿음이기 때문에 참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성령이 오실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행 1:8절에 보면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처럼 성령이 임하지 않고는 증인이 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이 임하지 않아도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증인이란 단지 예수를 믿으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증인은 자신이 본 것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즉 자신이 본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 증인입니다. 하지만 눈으로 본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것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보게 된 그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성령이 임하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 피를 보게 됩니다. 그 피가 죄인에게 왜 생명인가를 확실하게 보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이 그 마음에 함께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골 3:1-3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땅에서는 죽은 자입니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산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생명은 이미 예수님이 계신 하늘에 속한 영원한 생명으로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지 하늘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생겼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늘을 바라보는 신자는 위엣 것에 모든 소망을 두게 됩니다. 땅의 것은 헛된 것이고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하늘에 마음을 두고 하늘을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세상의 문제에 매이지 않게 되고,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가 있다고 해도 흔들림이 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신자로 살게 됩니다. 이것이 산자답게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13)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배고픔과 풍부라고 하는 땅의 문제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배고픔과 풍부와 상관없이 바울은 항상 하늘을 소망하는 자로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기쁨의 근원이었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바울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배고픔도 궁핍도 고난도 예수님을 향한 바울의 마음을 훼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던 사도 바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곧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께 소망과 기쁨으로 다가올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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