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6.25 17:29

(83강) 세일 산을 향한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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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5:1-5http://onlycross.net/videos/eze/eze-350105.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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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네 얼굴을 세일 산으로 향하고 그에게 예언하여

3.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세일 산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손을 네 위에 펴서 네가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할지라

4.내가 네 성읍들을 무너뜨리며 네가 황폐하게 되리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5.네가 옛날부터 한을 품고 이스라엘 족속의 환난 때 곧 죄악의 마지막 때에 칼의 위력에 그들을 넘겼도다

 

<설교>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얼굴을 세일 산으로 향하여 그들에게 예언하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세일 산을 향한 예언은 심판에 대한 것이었고 그것이 35장의 전체 내용입니다.

 

 

세일 산은 에돔 족속의 거주지였고 에돔 족속은 야곱의 형제인 에서의 자손입니다. 따라서 세일 산은 에서의 자손 에돔 족속을 가리키는 것으로 에돔을 향한 심판 예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에돔을 향한 심판 예언은 겔 25:12-14절에도 언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또 다시 에돔의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심판 예언이 반복된다고 해서 ‘에돔이 다른 민족에 비해 더 악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기준과 시각에서는 악인도 덜 악한 악인과 특별히 더 악한 악인으로 구분 되지만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모든 인간이 심판을 받아야 할 악인으로 규정될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기준에는 덜 악한 악인과 더 악한 악인으로 나뉜다 해도 결국 모두가 심판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심판이 반복되는 것을 따진다면 이스라엘이 더합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은 계속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이 누구를 심판하시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축복이고 무엇이 저주인가?’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에돔을 향한 심판 예언이 그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에돔을 향한 심판 예언에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에돔이라는 족속 자체가 여러분과 무관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 나라가 심판을 받았다 해도 지금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에돔은 에서의 자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야곱의 형제이며 야곱과 동일한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즉 혈통으로 따지면 이방인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돔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그들이 저주에 속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에돔에게서 나타나는 속성을 증거삼아 저주에 속한 자가 누구인가를 드러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돔을 향한 심판이 단지 ‘에돔이란 족속이 죄가 있어서 하나님이 심판 하신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서라면 심판 이야기가 반복될 필요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한번 언급된 것으로 에돔이 하나님께 심판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에돔이 심판 받는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러한 속성을 가진 인간은 심판의 대상이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에돔의 속성이 우리에게서도 드러난다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당연히 우리도 에돔과 동일하게 심판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면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여김 받지 못하는 에돔의 역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에돔을 통해서 우리가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고, 이는 에돔 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 예언이 우리에게 증거 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3,4절을 보면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세일 산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손을 네 위에 펴서 네가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할지라 내가 네 성읍들을 무너뜨리며 네가 황폐하게 되리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에돔을 대적하여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신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에돔에 대해서 이렇게 행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을 5절에서 “네가 옛날부터 한을 품고 이스라엘 족속의 환난 때 곧 죄악의 마지막 때에 칼의 위력에 그들을 넘겼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에돔은 옛날부터 이스라엘에 대해 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원수로 생각한 것입니다. 옛날부터라는 것은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을 야비한 방법으로 빼앗고, 에서가 받을 축복도 이삭을 속여서 자신이 가로챈 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돔이 이스라엘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광야 길에서도 드러납니다. 민 20장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향해 갈 때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에돔의 땅을 지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청을 하였지만 에돔 왕은 거절합니다. 이러한 일들에서 에돔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에돔이 이스라엘에 대해 한을 품게 된 결정적 사건은 다윗 때에 발생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통치할 때 에돔을 쳐서 만 팔천 명을 죽이고 에돔 사람을 종으로 삼은 것입니다(삼하 8:13-14). 이 사건으로 인해서 에돔이 이스라엘에게 한을 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으로 있던 에돔은 여호람 왕 때 이스라엘을 배반하고 자기들 위에 왕을 세우고 독립을 하게 됩니다(왕하 8:22). 비로소 이스라엘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에돔이 기회만 되면 이스라엘을 향해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5절에서 이스라엘의 환난 때 칼의 위력에 그들을 넘겼다는 것도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때 바벨론을 도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돔이 단지 이스라엘을 고통 받게 하고자 하는 복수심만으로 바벨론을 도왔다기보다는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땅을 차지하고자하는 의도가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에돔의 의도는 10절의 “네가 말하기를 이 두 민족과 두 땅은 다 내 것이며 내 기업이 되리라 하였도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셨느니라”는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두 민족, 두 땅은 북 이스라엘과 남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이미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 받았고, 예루살렘도 무너지고 왕과 고관들을 포함해 거의 모든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자 세일 산을 중심하여 거주지로 삼고 있던 에돔이 이스라엘 땅에 들어와 거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해 한을 품고 있던 에돔에게는 유다의 멸망이 기쁨이 되었고 그것을 기회로 황폐하게 된 예루살렘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서 에돔 족속의 잘못된 속성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아무도 없는 땅이라고 여겼던 예루살렘에 여호와께서 계셨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에돔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황폐하게 된 그 땅에 설마 여호와가 계실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호와가 계신다면 거룩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수 없다는 것이 사람들의 동일한 사고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신의 존재를 신을 믿는 사람들의 번성에서 확인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번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멸망한 땅에 여호와가 계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이유로 에돔을 심판하시겠다고 예언하시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에돔이 이스라엘에 대해 한을 품고 바벨론을 도와 이스라엘을 멸망하게 한 일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에돔이 이스라엘과 남남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형제 관계에 있으면서도 이스라엘을 돕지 않고 오히려 바벨론을 도운 것을 심판의 이유로 규정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오직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편협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임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심판이 이스라엘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네가 이스라엘 산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 산들이 황폐하였으므로 우리에게 넘겨주어서 삼키게 되었다 하여 욕하는 모든 말을 나 여호와가 들은 줄을 네가 알리로다 너희가 나를 대적하여 입으로 자랑하며 나를 대적하여 여러 가지로 말한 것을 내가 들었노라”(12,13절)고 말씀하는 것처럼 에돔이 이스라엘을 욕한 것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에돔이 이러한 이유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사실 하나님의 심판 이유는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도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했다는 것이 이유이지만 이것을 모든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로 받아들이기에는 미흡하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노아 시대의 악함을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으로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홍수로 심판을 받으면서 자신들이 왜 심판을 받아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았을까요? 몰랐을 것입니다. 아예 자신들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죽는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죽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심판의 내막과 이유를 들었고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우리는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그리고 성경에 언급되는 수많은 이방 나라와 이스라엘이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심판의 내막과 이유를 알게 되었다면 우리에게서는 어떤 반응이 있어야 할까요? 우리가 심판받은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고 에돔이고 이방 나라라는 것입니다.

 

 

심판의 내막과 이유를 알게 된다면 ‘나는 구원 받는 것이 당연하고 축복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는 말은 할 수 없게 됩니다. 만약 누구든 자신에 대해 그런 생각을 갖는다면 그것이 곧 저주에 속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나는 축복을 받아야 한다’가 아니라 ‘나는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나는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살아있는 그 사람에게 십자가가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죽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처럼 그 마음에 참된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사람에게는 교회 부흥, 세상에서의 번성 등은 의미 없는 것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이 생명과 무관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 행운이 찾아오기를 열망합니다. 행운을 향한 열망으로 자기 행동에 불행이 될 수 있는 요소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옛말처럼 ‘이렇게 하면 복이 달아난다’는 말에 민감해 하면서 늘 행운과 연결된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 또한 예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간의 행위에 따라 행운과 불행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은연중에 불행이 된다는 요소를 멀리하려는 의식이 있습니다. 가령 폰 번호가 4444가 있고 7777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번호를 원하시겠습니까? 아마 행운의 숫자라고 하는 7777을 선호할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7777이 아니라 4444를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4444든 7777이든 숫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숫자를 보면서 행운과 불행을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습성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4444를 택한다 해도 그 역시 자신에게 매어있는 것일 뿐입니다.

 

 

4444를 택하든 7777을 택하든 인간은 심판을 받을 땅에서 심판을 받아야 할 자로 존재할 뿐입니다. 이 세상에 복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따라서 복은 우리의 선한 행동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함께 하신 그것이 곧 복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에돔은 다윗 왕에 의해서 다윗의 종이 되었습니다. 즉 다윗에 의해 다윗에게 속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에게 속하여 다윗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다윗의 나라에 속하여 구원의 복을 누리는 길이 주어졌음을 뜻합니다. 에돔이 다윗의 종이 됨으로 누리게 되는 복이 내막을 알았다면 독립하고자 했을까요?

 

 

결국 에돔이 이스라엘로부터 독립하고 다윗의 종이 되었던 것을 한으로 품었다는 것은 여호와께 속한 자로 사는 것보다 자신의 힘으로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인생을 뜻을 두었다는 말해줍니다. 이것에 모든 인간의 습성입니다.

 

 

하나님은 에돔이 이스라엘을 욕하고 조롱한 것을 이스라엘을 대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에돔을 대적하여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고 성읍들을 무너뜨려 황폐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에돔이 조롱한 이스라엘과 같은 운명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에돔이 다른 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어린양의 죽음이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된 근거는 어린양의 죽음에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애굽땅에 있었던 장자 재앙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애굽을 나왔고, 장자 재앙에서 살아남게 된 이유는 어린양의 죽음과 피에 있었던 것입니다.

 

 

출 12:13절을 보면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어린양의 피는 이스라엘을 위한 표적이 되었습니다. 죽었다는 표적이 되어 죽음의 재앙이 넘어간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성이 장자 재앙에서 살아나는 조건과 근거가 되었다면 어린양의 피는 필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만 골라서 장자 재앙을 피하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죽음 아래 있는 자들에게 생명의 표적은 혈통, 윤리, 행함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가 유일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어린양의 피를 믿지 않는 자는 저주에 속한다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에돔은 황폐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이스라엘의 당하는 고통을 즐기고 조롱하면서 이스라엘의 땅이 내 것이라고 의기양양했지만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무너지고 이스라엘이 고통을 겪는 것이라면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라는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뜻을 가지고 그렇게 일하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에스겔을 배워오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방의 신을 섬기며 추구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하시고 심판이 마땅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구원의 길입니다.

 

 

따라서 비록 예루살렘에 황폐하게 되고 바벨론에 포로가 되는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이스라엘이지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스라엘은 복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신자를 바라는 시각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말하는 여러분 자신을 그러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번성과 성공에서 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족함이 없는 충만한 복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복의 세계에 존재하게 된 것으로 인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만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 신자입니다. 심판이 마땅한 자신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용서를 보게 되고 그 은혜와 사랑을 높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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