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7.09 18:12

(85강) 더러워진 땅과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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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6:16-21http://onlycross.net/videos/eze/eze-361621.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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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6.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7.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고국 땅에 거주할 때에 그들의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행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18.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 위에 쏟아

19.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여러 나라에 헤쳤더니

20.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21.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설교>

인간 본성에 있어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면 ‘이기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적이며 필연적으로 이기적인 행위자들로서 자신의 생존과 힘이 증대되는 일에 필요한 것을 추구하는 이것이 모든 인간의 근본적 본질일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은 ‘이해타산’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어 있는데 바로 이점이 여러분께 설교하는 일에 있어서 매우 어려운 점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설교자 본인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는 민감한 문제입니다. 설교자 역시 이기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본성의 존재이기에 이해타산에 따라 말이 달라질 수 있는 위험에 강하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자기의 이해타산을 계산하지 않고 순전히 말씀만을 들고 청중들 앞에 선다는 것은 외로움을 자초하는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말씀의 대상인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서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는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고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 이해타산에 익숙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유익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물론 생명의 시각에서 보게 되면 말씀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중요한 것으로 다가오겠지만 인간은 생명보다 생존에 더 민감하다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때문에 생존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말씀에 무관심해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가 온전히 하나님 편에 선다면 백성들로부터는 반대와 함께 배척을 받게 됩니다. 이 때문에 이해타산을 따져 백성들에게 환영받는 선지자로 남기 위해 백성들이 듣기 원하는 말을 하는 거짓 선지자가 등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선지자는 자기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고 배척과 반대를 받는다 해도 온전히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에스겔서의 내용을 생각해 보면 에스겔 선지자 역시 자신의 유익과 득이라는 이해타산에 서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백성들에게 전하는 외로움과 고독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에스겔서를 보면서 에스겔 선지자의 그 같은 고충을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가는 길이 곧 우리가 가야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더럽힌 것에 대해 언급하는데 땅과 이름입니다. 17절을 보면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고국 땅에 거주할 때에 그들의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행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고 말씀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행위로 땅이 더렵혀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20절에서는 “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씀하면서 이스라엘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더러워졌다고 합니다.

 

 

먼저 땅에 대해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이 더럽힌 땅은 그들이 거주하고 있던 가나안 땅으로써 약속의 땅을 말합니다. 그 땅을 더럽혔다면 이스라엘이 더럽히기 전에는 깨끗한 땅, 즉 거룩한 땅이었다는 뜻이 되는데 실제로는 가나안 땅이라고 해서 다른 땅에 비해 특별히 다른 것은 없습니다. 땅은 땅일 뿐이고 비옥하냐 척박하냐라는 차이에 의해서 좋은 땅, 나쁜 땅으로 구별될 뿐입니다.

 

 

더군다나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기 전에는 이방 족속이 차지하여 기거하던 곳으로 온갖 우상이 가득한 땅이었습니다. 그런 땅을 거룩하다 할 수 있는 근거는 단 하나, 하나님의 약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의 자발적 의지와 자율적 능력으로 들어갈 수 없는 땅입니다. 애굽의 종으로 생활하던 이스라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약속의 땅을 소망하며 그 땅으로 가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설사 그런 의지가 있었다 해도 자율적으로 애굽을 벗어나 약속의 땅으로 갈 능력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이해타산에는 비록 애굽의 종이라 해도 애굽 땅에서의 생활보다 못한 광야 여정보다는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모든 것을 그들의 자율적 의지에 맡기신 것이었다면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이라는 신분과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끌어 들이시고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은혜’입니다. 함께 하실 가치가 없는 자에게 함께 해주시고, 버림받아 마땅한 자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기업으로 주신 모든 일이 약속을 하시고 약속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면 그들에게서는 자기 이해타산이 나와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위한 이해타산을 계산하고 행동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보이는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해타산을 계산했습니다. 신앙의 문제를 생존이 중심이 된 이해타산을 앞세웠기에 자신들에게 득이 된다고 생각한 우상을 성전으로 끌어 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행위로 거룩한 땅을 더럽힌 것입니다.

 

 

레 18:3-5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가 아닌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따를 것을 요구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를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내용들이 자기 이해타산을 계산하는 것에 익숙하고 그것이 습성인 우리에게는 달갑지 않은 내용으로 다가올 뿐만 아니라 관심이 끌리지도 않습니다. 무관심으로 반응할 것이라는 것도 잘 압니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설교를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죄악 된 본성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해결책은 하나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영화롭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기쁨이 되는 영의 사람으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새 영을 우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주심으로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26,27절).

 

 

하나님은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에게 이방 풍속이 아닌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따르고 지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에게서는 본받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들이 최고의 도덕과 윤리적 삶을 보여준다 해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본받을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약속의 땅의 거룩은 도덕과 윤리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방 풍속은 죄 자체를 의미합니다. 풍속의 모든 것이 죄로 시작하여 죄로 마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모든 것이 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가나안 거민들을 약속의 땅에서 쫓아내신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또한 이방인의 풍속을 따라 행한다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야 합니다. 이것을 레 18:28절에서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심판이 마땅함을 알게 되고 그럼에도 자신의 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마음을 두게 됨으로 생존이 아닌 생명에 대한 관심이 그 심령에 자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택한 백성 됨의 증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무엇을 위해서일까요? 이방인이 자기의 신을 부르는 것처럼 세상을 향한 욕망의 성취와 생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일까요?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 됩니다. 때문에 현대 교회가 기도의 열정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열정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20절에 보면 “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어떻게 더럽혀졌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은 구원될 수 없는 자를 구원하시는 자비와 사랑과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높이고 하나님이 베푸신 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면 그는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 될 수 없는 자신을 보게 되면서 자기 욕망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욕망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신의 열심을 하나님이 기쁘게 여기시고 원하는 바를 이뤄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현대 교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의도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의 자발적 의지와 자율적 능력과는 무관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일 뿐입니다. 약속을 성취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이스라엘을 이끈 결과가 약속의 땅입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철저한 자기 부인과 함께 하나님이 성취하신 일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약속의 땅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물인데도 불구하고 이방 나라를 부러워하면서 자신들의 풍요를 위해 하나님을 부른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것이 됩니다. 그리고 레위기의 말씀대로 그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게 하셨고 이젠 다시 회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대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면서 접하는 현실과 전혀 무관한 내용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말씀을 들어도 마음이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해타산을 계산하며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길을 좇는 우리의 문제일 뿐입니다. 어쨌든 현실적이지 않고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내용이라 해도 계속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을 거룩한 땅과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자들입니다. 그로 인해 거주하던 땅에서 쫓겨나 이방의 포로가 되어 이방 땅에서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회복을 말씀합니다. 그것이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이방 땅에서 고생하던 이스라엘을 거주하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신다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회복이 이스라엘을 위한 사랑이라면 처음부터 포로가 되지 않게 하셨거나 포로가 되게 하셨어도 금방 원래의 이스라엘로 되돌려 놓으시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닙니다. 이것을 21,22절에서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 일하십니다. 23절에서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이 더럽힌 이름을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더럽힌 이름을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그들을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물으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죄를 가리시고 자비와 은혜로 거룩한 자로 여겨주신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며, 비로소 그동안 그토록 부러워했던 이방의 것이 자신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아끼시고 우리가 더럽힌 이름을 거룩하시는 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실패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어쩌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관심 없고 여러분이 원하는 바가 이뤄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굳어있는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럽게 하셔서 우리가 더럽힌 이름을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과 의지에 의해서 우리의 구원이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신다면 천국에 보내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오실 이유도 없고 많은 분량의 성경도 불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보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남겨 놓으신 것은 우리 또한 우리가 더럽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땅과 이름을 더럽히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더럽히는 이름을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일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시고 일하시고 도우시고 지키시는 이유는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위해 무엇이 나를 살게 하는가를 보게 하시며 세상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고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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