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8.13 17:31

(90강) 둘이 하나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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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7:15-23http://onlycross.net/videos/eze/eze-37152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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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5.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6.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17.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18.네 민족이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거든

19.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 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가져다가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20.너는 그 글 쓴 막대기들을 무리의 눈 앞에서 손에 잡고

21.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잡혀 간 여러 나라에서 인도하며 그 사방에서 모아서 그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

22.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23.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하게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설교>

우리가 성경을 보면 도무지 납득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내용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뜬구름 잡는 듯 한 느낌을 떨쳐 버리지 못합니다. 가령 영생이라는 말에 대해 수없이 말하고 듣지만 영생이 무엇인지 정확한 실체나 상태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 정도로만 이해합니다.

 

 

또한 부활을 소망하지만 부활의 상태 역시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이 역시도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생과 부활은 그보다 더 차원 높은 신비한 다른 영역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정확한 설명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하고 보지 못한 세계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가 경험하지 못하고 보지 못한 세계를 말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죄의 영향 아래 있어서 죄로 말미암아 납득하지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의 갈빗대 하나로 여자를 만드셨을 때 아담을 여자를 가리켜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표현합니다. 여러분은 아담의 이 말이 납득이 되십니까? 또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에게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한 한 몸은 단지 부부가 되어 동침하는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육신은 서로 나누어져 둘이지만 둘을 둘로 보지 않고 하나로 여기는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 됨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이기적 속성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죄로 인해서 ‘하나’라는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7절에 보면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두 개의 막대기를 하나가 되게 하라는 것인데, 이것도 상식과 이치를 따져 생각해 보면 가능하지 않는 일입니다. 두 개의 막대기는 서로 독립되어 있는 각각의 개체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나 되게 할 수 있습니까?

 

 

두 개를 묶어 놓거나, 못을 박거나, 접착제를 발라서 강제로 하나가 되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실제적으로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가 되게 하라는 것도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또 다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되리라’는 말은 ‘되어 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둘이 하나가 되리라’는 말씀은 둘로 나누어졌던 관계가 하나님에 의해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두 개의 나무 막대기를 가져다가 하나는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라 하고 다른 하나에는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쓰라합니다. 그리고 이 두 막대기를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합니다. 그러면 에스겔의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행동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상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슨 뜻인지 묻는 사람에게 대답할 말을 일러 주시는 것이 19-23절입니다.

 

 

21-22절을 보면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잡혀 간 여러 나라에서 인도하며 그 사방에서 모아서 그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고 말씀합니다.

 

 

쉽게 말해서 남과 북으로 분열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을 사방에서 모아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하여 한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을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분열된 이스라엘을 하나 되게 하는데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분열된 나라의 통일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는 사람들은 본문을 인용해서 남북통일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수천 년 후에 있을 대한민국의 남북통일을 위해 이 말씀을 남겨 두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우리의 상황에 끼어 맞추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분열된 이스라엘의 통일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먼저는 이스라엘의 하나 됨이 하나님이 뜻이라면 왜 분열될 때 가만 계셨느냐는 의문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고국 땅으로 돌아간 뒤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통일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이 있는 남쪽 유대지역의 백성들과 북쪽 이스라엘이 위치한 사마리아 지역의 백성으로 나뉘어져 서로를 배척하는 관계만 계속되었을 뿐입니다.

 

 

또한 23절에서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하게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한 나라가 되어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는 믿음의 길로 가게 된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고국에 돌아가서도 여전히 우상을 섬겼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보여준 현실은 본문의 내용과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둘이 하나가 되리라는 말씀은 단지 분열된 나라의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설령 이스라엘이 통일을 이룬다 해도 하나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오랜 기간 분열된 상태에서 한쪽은 성전이 있고 한쪽은 성전이 없는 상태로 제사를 드리기도 했기 때문에 신앙적인 부분에서도 하나 될 수 없는 벽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에서 잘 드러납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요 4:9)라는 말이나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요 4:12)는 말에서 사마리아 사람도 나름대로 종교적 우월감이 있었음을 생각해 보면 이들의 만남은 결국 서로의 우월감의 충돌로 나타날 수밖에 없음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에서의 하나 됨은 불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관계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도 ‘하나 됨’‘연합’을 강조합니다.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하나 될 것을 강조한다 해도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로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경험하는 것은 서로가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우월감과 자존심의 충돌 뿐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둘이 하나가 되리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분열된 관계가 화해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화해했다 할지라도 어떤 사건으로 인해서 언제 또 다시 분열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둘이 하나가 되게 하신다는 것일까요?

 

 

17절을 다시 보면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고 말합니다.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는 것은 에스겔의 손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16절에 보면 에스겔을 인자로 일컫습니다. 에스겔서에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인자로 호칭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인자로 호칭되는 선지자는 에스겔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 인자로 호칭된 적이 있지만 그것은 한번 뿐입니다(단 8:17).

 

 

그런데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스스로를 인자로 말합니다. 인자가 ‘사람의 아들’이란 뜻으로 해석되면서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는 의미의 인자로 이해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에스겔을 인자로 이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에스겔이 인자로 호칭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입니다. 1:3절을 보면 에스겔은 자신을 ‘나 에스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2:1절에서 하나님이 에스겔을 에스겔이라 하지 않고 인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겔 2:1-3절을 보면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인자라는 호칭은 고난과 연결되어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에스겔에게 임하여 하나님을 배반한 패역한 백성에게 보내시는 것이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을 배반한 유대인들에게 보냄 받는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렇게 보면 에스겔의 고난이 예수님의 고난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인자는 고난 받는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고난 받은 인자의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자 안에서’또는 ‘인자로 인해서’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둘이 하나가 되는 중요한 열쇠는 인자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보냄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자의 고난은 패역한 백성들로 인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에게로 보냄 받은 것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이 언약에 의해 하나님을 배반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고난의 현장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에스겔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보냄 받음으로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붙들려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백성이라고 자처한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배반한 패역한 백성이라면 다른 민족은 두말할 것 없이 심판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스라엘이 고국 땅으로 보냄을 받으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을 배반한 패역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들 또한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이방인과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둘이 하나가 되는 기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왕의 다스림 아래 있던 이스라엘이 두 나라로 나누어져 두 왕이 있게 된 원인은 솔로몬에게 있습니다. 왕상 11:11절에서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고 말한 것처럼 솔로몬이 말년에 여인에게 빠져 우상을 섬기게 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였습니다.

 

 

나누어진 두 나라는 모두 우상을 섬기는 길로 갔고 그로 인해 나라가 무너지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들이 겪게 된 모든 고통의 원인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해 에스겔을 고난의 현장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하지만 바벨론의 이스라엘은 에스겔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책망하는 말이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하나님을 배반한 패역한 존재임을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져 황폐하게 되고 고통의 길로 가는 모든 원인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고백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우상으로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고 정결하게 되며 하나님이 백성이 되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말씀한 살아난 마른 뼈입니다.

 

 

모든 고통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아는 이것이 둘이 하나 되게 합니다. 문제는 인간이 모든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너 때문이다’라는 생각으로 원인을 타인에게 돌리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이 나누어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우리도 몸은 같은 공간에서 함께 한다 해도 모든 잘못이 나에게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자로 함께 하기에 둘로 나누어진 관계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한 나라를 이루고 한 임금의 다스림을 받는다면 그것은 새로운 나라의 탄생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분열되기 전의 이스라엘로 돌아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본문은 남북통일과는 무관한 내용입니다.

 

 

둘이 하나가 되는 새로운 나라는 인자의 나라입니다. 고난 받은 자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고난 받은 인자를 보면서 인자의 고난이 나의 죄로 인해서라는 자기 인식이 있는 나라를 말합니다. 이러한 자기 인식을 거부한다면 그는 인자의 나라와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는 것도 인자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의 죄로 인해서’라는 자기 인식이 살아있는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 백성이 되게 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고자 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여러분 자신의 죄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항상 여러분 속에 ‘나의 죄로 인해서’라는 자기 인식으로 살아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둘이 하나 되어 세워진 새로운 나라입니다.

 

 

이것을 이용해서 ‘왜 너는 너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느냐’라고 상대방을 비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상대방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든 안하든 여러분이 생각하고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나의 죄로 인해서’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인해 세워진 둘이 하나 된 새로운 나라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를 알려줍니다. 성경이 알게 하는 죄는 윤리적 차원의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윤리와 도덕의 실천에도 죄가 있음을 알게 합니다. 하지만 말씀 밖에 있는 세상은 그것을 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를 범하기도 하지만 선을 행하기도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향해서 성경은 선을 행하는 자가 아무도 없다고 선언해 버립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죄를 알지 못하고 자기의 선함을 주장하는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책임지신 것이고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죽음으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나로 인해서’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인자의 고난 안에서는 자기의 선함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나의 죄로 인해서’라는 자기 인식이 있을 뿐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서 죄를 끄집어내면서 둘이 하나 된 새 나라로 세워 가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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