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8.20 18:07

(91강) 영원한 언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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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7:24-28http://onlycross.net/videos/eze/eze-37242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4.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 모두에게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수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25.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땅에 그들이 거주하되 그들과 그들의 자자 손손이 영원히 거기에 거주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

26.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27.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28.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 가운데에 있으리니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을 열국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

 

 

<설교>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서 대개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게 되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고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심판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인에게 형성되어 있는 신앙에 대한 기본적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해의 시각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여러분에게 남는 것은 혼란과 의심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수시로 그 마음이 바뀌는 변덕으로 가득한 신으로 전락될 것입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고통의 세월을 보내게 하셨다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변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분명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되는 것은 단지 자신의 종교세계에 자기 경험과, 상상과, 지식과, 욕망에 덮인 종교성에 의해 구축된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안다고는 하나 실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 형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있고 신앙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고 꿈꾸는 신앙의 길을 걷지 못할 때 당황하게 됩니다. 오히려 마음이 침체되고 기쁨이 없고 삶도 힘들어지면서 도무지 신앙생활을 한다는 실감이 나지 않고 거의 체념하게 되면서 교회는 아무 기대도 감동도 없이 단지 왕래하는 수준으로 쇠락하기도 합니다. 제가 볼 때 현대의 기독교인은 이러한 위기에 봉착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신앙의 길에는 기쁨이 있고, 평강이 있으며, 위로와 감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앎이 바르게 정립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앎이 바르게 구축되어지면 신자가 신앙의 길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자연히 누리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바른 앎을 갖고 있다 해도 현실의 문제에서는 언제나 앎은 사라지고 눈앞의 현실에만 집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신앙의 삶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만만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우리로서는 불가능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오게 되면 신앙에 대한 우리의 고민은 모두 해결되는 것입니다. 낙심도 절망도 사라지고 기쁨과 위로가 주어지면서 힘 있는 신앙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까? 아마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오심에 이러한 기대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침체된 것 같은 자신의 상태를 생각하면서 ‘성령이 오셔서 함께 하심’즉 ‘성령의 내주’를 스스로 부인해 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셨다면 자신의 내면 상태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바울에게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는 애통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죄로 인해 애통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바울이 스스로를 죄인 중의 괴수로 고백했던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을 죄로 가득한 존재로 여겼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성령을 받지 못해서 죄를 극복하지 못하고 죄로 인해 애통해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예수님을 알았고 복음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을 극복하고 선을 행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믿음이 주어지고 복음을 알게 되고 성령이 오신 것은 그 한계를 극복하고 넘어서는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직시하고 그 한계 앞에 무너진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게 되면 하나님을 위해 살지도 않고 살 수도 없는 자신은 하나님 앞에 쓸모없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자를 그릇으로 삼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담아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알게 될 때 비로소 그 은혜와 사랑에 눈을 뜨고 조금씩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믿음이 주어지고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고 영원한 언약에 의한 하나님의 행하심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신앙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행함을 하나님께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이 우리에게 담아내시는 것에 마음을 두는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기독교인들이 신앙에 대해 오해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적 행동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연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실천의 여부가 신앙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자리하는 것입니다.

 

 

호 6:6절에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제사와 번제는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규례에 속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실천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실천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무엇을 해도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 있습니다. 무엇으로도 단절된 관계는 회복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단절의 상태에 있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것으로 살리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이며 그것이 언약인 것입니다. 이 언약을 본문 26절에서 화평의 언약이라고 하고, 화평의 언약을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여 이스라엘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겔 34:25,26절을 보면“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는 존재임을 뜻하는데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고통을 당하는 현실에서는 누가 봐도 복이 아닌 저주 아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에게 화평의 언약을 맺고 복된 소낙비를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복은 화평의 언약관계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법칙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무너진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은 누구도 하나님의 언약을 지킬 수가 없으며 따라서 저주에 속한 자로 심판을 받아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면서부터 하나님의 복과는 상관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화평의 언약을 세우시고 복을 말씀하신 것은 복은 화평의 언약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어떤 실천과 행함으로도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이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복이 되는 실천사항을 만들고 그대로 실천하여 복을 받아보고자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애당초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간의 종교세계를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성경은 복과 함께 저주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때문에 복에 대해서만 말할 수 없고 저주에 대해서만 말할 수도 없습니다. 반드시 복과 함께 저주를 말함으로써 무엇이 복이고 무엇이 저주이며 누가 복의 세계에 해당되고 누가 저주의 세계에 해당되는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복과 저주에 대해 크게 오해 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한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복의 내막과 저주의 내막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지 않으면 인간의 종교성으로 자기를 위한 신을 찾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신앙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복과는 상관이 없는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아는가 모르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복이냐 저주냐’라는 운명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기에 중요하고도 심각한 것입니다.

 

 

복과 저주를 말할 때 누구나 복은 받고 싶고 저주는 받지 않겠다고 하지만 복과 저주는 인간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복과 저주는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저주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복을 받을 행동을 하면 복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곧 복의 세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곧 복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며 그 사랑을 언약이라는 방식에 담아서 알리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화평의 언약’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시고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 끌고 가신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언약은 화평의 언약입니다. 화평의 언약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만 하나님과의 화평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이 행하는 무엇으로도 하나님과 화평해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고 지키심으로써 화평의 관계에 있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24,25절에 보면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 모두에게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수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땅에 그들이 거주하되 그들과 그들의 자자 손손이 영원히 거기에 거주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왕으로, 한 목자로 등장합니다. 이것은 다윗을 왕으로 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두 막대기가 에스겔의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분열된 이스라엘이 하나가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영원한 왕이 되고 목자가 되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등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6절에서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27절에서는 내 처소가 그들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하고, 28절에서는 내 성소가 영원히 그들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을 왕으로 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등장은 성소, 처소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소, 처소는 장차 메시아로 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을 용서 아래 있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뜻한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의미하는 것은 구원을 위해서 인간은 한 일,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심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영원한 왕이 된 새로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완성만을 바라보는 관계에 있게 되는 것이며 그 완성이 곧 사랑인 것입니다.

 

 

엡 2:14-15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이는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시겠다는 본문의 말씀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화평의 언약을 말씀하면서 성소, 처소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 끌고 가시고 다시 데리고 나오셔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둘이 하나가 된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기 위함이고 그 하나 됨이 우리의 화평이 되시는 메시아, 그리스도로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새로운 관계에 있습니다. 영원한 화평의 언약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 언약 관계에서 특별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아무런 차별이 없게 된 것처럼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차별되지 않은 관계에 묶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우리가 서로 아무런 차별이 없는 관계에 있으니까 서로 차별하지 말고 사이좋게 잘 지내자는 도덕적 교훈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리스도가 피 흘리신 의미를 아는 것이 믿음의 내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이 오십니다. 죄를 극복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죄를 보게 됨으로써 자신의 무가치함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컬음 받으며 하나님은 이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고 말씀하지만 사실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인 다윗은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를 영원한 왕으로 세우시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왕인 새로운 나라는 하나님의 용서 아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골 3:11-14절을 보면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화평이신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새로운 나라 즉 교회입니다. 선함을 행한 인간의 실천으로는 불가능한, 오직 화평이신 그리스도의 피로만 가능한 새로운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에게 신비스러운 하늘의 일이며 하나님의 사랑이고 기적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안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아는 여러분에게서 드러나는 것이 뭔가를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앞에서 드러나는 것은 우리는 여전히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고 예수님을 안다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나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 앞에 부끄러운 자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화평이 가능하게 됩니다.

 

 

화평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모여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화평하게 되고 그 화평으로 한 몸의 관계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화평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은 물론이고 교회에서도 화평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완성된 화평의 나라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우리는 다만 죄의 존재일 뿐입니다. 어떤 행위가 우리를 죄인 되게 한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 전부터 죄의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죽음의 존재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화평이라고 하십니다. 우린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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