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8.27 19:42

(92강) 이스라엘과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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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8:10-16http://onlycross.net/videos/eze/eze-38101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0.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 날에 네 마음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나서 악한 꾀를 내어

11.말하기를 내가 평원의 고을들로 올라 가리라 성벽도 없고 문이나 빗장이 없어도 염려 없이 다 평안히 거주하는 백성에게 나아가서

12.물건을 겁탈하며 노략하리라 하고 네 손을 들어서 황폐하였다가 지금 사람이 거주하는 땅과 여러 나라에서 모여서 짐승과 재물을 얻고 세상 중앙에 거주하는 백성을 치고자 할 때에

13.스바와 드단과 다시스의 상인과 그 부자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탈취하러 왔느냐 네가 네 무리를 모아 노략하고자 하느냐 은과 금을 빼앗으며 짐승과 재물을 빼앗으며 물건을 크게 약탈하여 가고자 하느냐 하리라

14.인자야 너는 또 예언하여 곡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 이스라엘이 평안히 거주하는 날에 네가 어찌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15.네가 네 고국 땅 북쪽 끝에서 많은 백성 곧 다 말을 탄 큰 무리와 능한 군대와 함께 오되

16.구름이 땅을 덮음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 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눈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이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라

 

 

<설교>

신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존귀하시고 보배로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이 삶의 자리로 연결되지 못하고 한낱 말로 끝나는 것을 날마다 경험합니다. 신앙은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약 신앙이 삶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관념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존귀하시고 보배로우신 분이라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의 공통적인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이 고백이 삶의 자리와 연결된다면 어떤 삶으로 나타나야 할까요?

 

 

사 33:5-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존귀하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하심이요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심이라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고 말합니다.

 

 

지극히 존귀하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네 보배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자체가 신자에게는 보배이기 때문에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 하나만 남아도 되는 것이 신자입니다.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도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자신이 원하는 다른 가치 있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여호와를 존귀하신 분으로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잘못됨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도 그리스도를 믿는 것 하나로 됐습니다’라는 참된 가치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믿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예수님이 다 이루신 완성의 세계에 들어와 있기에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믿음 하나로 신자는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완성이라는 자리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완성이 의미하는 것은 날마다 기쁨과 감사와 위로와 평강이 있는 삶을 산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하나만 남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바로 이것을 담아서 나타내는 길로 붙들려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행복 시작이 아니라 고난의 시작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소설이나 영화, TV드라마, 연극 등에서 그 결말이 모든 문제와 갈등이 해결된 행복으로 끝나는 것을 ‘해피엔딩’이라고 합니다. 독자나 시청자들은 해피엔딩의 결말을 보면서 그 주인공들이 앞으로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실제 삶이라면 행복한 결말의 상태는 결코 계속 지속되지 않습니다. 예상치도 못한 다양한 삶의 사건들을 접하게 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왜 이렇게 인생을 흔드시는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가장 존귀하시고 보배로우신 분이라면 신자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가장 가치 있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또 다른 어떤 일로 자신을 가치 있게 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의 가치를 멸시하는 것이 됨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잘 믿는다 하여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편안한 삶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삶에서도 믿음의 가치만 드러나는 것으로 신자 됨이 증거 되는 것을 위해 삶이 흔들리는 고통이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에서 그 같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우리는 36장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 나라로 흩어진 이스라엘 민족을 모아 데리고 고국 땅으로 들어가서 그들을 정결하게 하고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어 부드러운 마음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겔 36:24-27)

 

 

또한 37장에서는 에스겔에게 마른 뼈가 살아나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이스라엘을 무덤을 열고 나오게 하시며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소망이 없고 멸절된 것과 같은 상태였던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말씀들은 분명 희망과 회복을 생각하게 하는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러한 희망과 회복에 대한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마곡 땅에서 곡을 등장하게 하여 평안히 거주하는 이스라엘을 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기실 이러한 말씀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고 도대체 하나님이 일하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혼란에 빠뜨리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벨론에서 고통을 겪다가 겨우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되어 평안히 거주하게 되었는데 또다시 이방나라를 끄집어내어 이스라엘을 치게 하심으로 평온을 깨뜨리시겠다는 것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생각할 수도 없는 하나님 됨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회복이 곧 ‘고통 끝 행복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먼저 2절을 보면 “인자야 너는 마곡 땅에 있는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곧 곡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에게 예언하여”라고 말합니다.

 

 

마곡 땅이 어느 지역의 땅을 말하는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이 마곡 땅에 로스, 메섹, 두발이라고 하는 세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 세 민족의 왕이 연합한 것을 곡으로 말합니다. 따라서 곡은 마곡 땅의 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곡을 바사와 구스와 붓과 고멜과 북쪽 끝의 도갈마 족속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여 그들 모두를 끌어 다가 16절에서 “구름이 땅을 덮음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 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눈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이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치게 하시는 이유는 이방 사람의 눈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어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곡을 끌어다가, 그것도 부족하여 다른 이방 민족까지 더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들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이 크게 잘못되어 있음을 자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여러 날 후 곧 말년에 네가 명령을 받고 그 땅 곧 오래 황폐하였던 이스라엘 산에 이르리니 그 땅 백성은 칼을 벗어나서 여러 나라에서 모여 들어오며 이방에서 나와 다 평안히 거주하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곡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치게 하실 때 이스라엘은 칼을 벗어나 이방에서 나와 평안히 거주하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곡 역시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내가 평원의 고을들로 올라 가리라 성벽도 없고 문이나 빗장이 없어도 염려 없이 다 평안히 거주하는 백성에게 나아가서”(11절)라고 말할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14절에서도 “인자야 너는 또 예언하여 곡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 이스라엘이 평안히 거주하는 날에 네가 어찌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평안히 거한다는 말이 거듭 반복되는 가운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평안을 누리는 상태로 가만히 두시지 않으시고 곡을 보내어 평안을 깨뜨리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을 원하지도 않을뿐더러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평안을 깨뜨리신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 평안히 거주하는 이스라엘에게 곡을 보내어 치신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그렇게 일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우리의 평안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기 위해 곡을 보내어 우리의 평안을 깨뜨리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갤 36:25-27절에 의하면 고국 땅으로 돌아가 평안히 거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 정결하게 되었고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셔서 부드러운 마음의 상태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평안을 깨뜨리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에서 언급하는 마곡과 곡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계 20:7,8절을 보면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옥에 갇혀 있든 사탄을 놓아 주셔서 사탄이 곡과 마곡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싸우게 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기 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사탄에게 미혹된 곡과 마곡과의 싸움 속에 있는 것이 참된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평안히 거주하는 이스라엘에게 마곡 땅의 곡을 보내어 치게 하는 것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왜 이런 싸움에 있게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고국 땅에 돌아가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보이십니다. 또한 도무지 정결해질 수 없는 그들을 정결하게 하시고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이 가장 존귀하신 분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보배가 됨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보배임을 알게 된 백성들은 하나님께 붙들려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보배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길로 이끌려 가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마곡 땅의 곡을 평안히 거하는 이스라엘로 보내어 치게 하시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보배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다시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존귀한 분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 믿음이 여러분에게 가장 유일한 단 하나의 가치로 남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믿음이 유일한 가치로 남는 것보다 믿는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 인정받고 싶어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것이 마귀로 인한 마곡과 곡의 싸움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이 싸움에 있을 수밖에 없고 이것을 환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존재가 되고자 하고 되기 위해 힘을 씁니다. 하지만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되어진 존재입니다. 완성된 존재로 완성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 말을 실감하지 못할 것입니다. 특히 현재의 자신을 보면서 부족을 느끼며 스스로에 대해 실망하는 것이 현실임을 생각한다면 완성된 존재는 자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완성의 의미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완성된 존재라는 것은 행동에 있어서 전혀 흠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창 6:9절을 보면 노아를 가리켜 당대에 완전한 자라 하고, 창 17:1절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신 18:13절에서는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완전’은 인간 자체의 완전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완전하신 분과의 과계로 인해 완전하다고 여김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되어야 할 것이 없고 이미 된 자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자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보면서 ‘얼마나 되어졌는가?’점검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되어진 성과가 있는 모습이 보이면 그것으로 흡족해 합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가치를 두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신자에게 완성의 세계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자로 존재하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유일한 가치로 남을 뿐입니다. 흔들리고 실패하고 넘어진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믿는 믿음이 있는 것으로 ‘난 됐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것이 신자로 말미암아 증거 되는 완성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마곡의 곡을 보내어 평안에 거하는 이스라엘을 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으면 평안을 누리며 잘 살게 된다는 것은 거짓된 인간의 말일 뿐입니다. 누차 말씀드린 것처럼 현실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과연 평안을 누리는지 둘러보십시오. 물론 평안한 환경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믿는 자가 동일하게 평안한 환경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환경의 평안이 평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 속에 믿음의 사람으로 존재한다면 미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믿음에 붙들려 산다는 것 자체가 환난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예수를 믿는 그것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당당하게 증거하게 되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겔 39장에 보면 마곡의 곡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곡의 곡의 활동은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기 위해 잠시 허용된 것뿐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옥에서 나온 사탄이 잠시 활동하다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붙들려 영원한 사망에 갇히는 심판을 받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마곡의 곡으로 평안히 거하는 이스라엘을 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 잘한다고 해서 환난과 상관없이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신앙생활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고통과 어려움을 겪기도 하는 것이 우리가 접하는 현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믿음은 보상을 약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보상을 꿈꾸지만 잘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인간인데 무슨 보상을 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으로 붙들어 놓으시는 것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가장 존귀하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거 하나만 있어도 된다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개의 기독교인들이 고통을 겪게 되면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자신의 죄를 찾아 회개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관심을 자신에게 두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자신을 향한 관심의 방향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의 길을 간다는 것 자체가 신자에게는 환난인 것입니다.

 

 

16절 뒤의 말씀의 다시 보십시오.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눈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이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고 이스라엘의 평안을 깨뜨리고 환난으로 밀어 넣으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것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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