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9.10 16:53

(93강) 나를 알게 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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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8:17-23http://onlycross.net/videos/eze/eze-38172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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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7.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옛적에 내 종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한 사람이 네가 아니냐 그들이 그 때에 여러 해 동안 예언하기를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그들을 치게 하리라

18.그 날에 곡이 이스라엘 땅을 치러 오면 내 노여움이 내 얼굴에 나타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9.내가 질투와 맹렬한 노여움으로 말하였거니와 그 날에 큰 지진이 이스라엘 땅에 일어나서

20.바다의 고기들과 공중의 새들과 들의 짐승들과 땅에 기는 모든 벌레와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내 앞에서 떨 것이며 모든 산이 무너지며 절벽이 떨어지며 모든 성벽이 땅에 무너지리라

21.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내 모든 산 중에서 그를 칠 칼을 부르리니 각 사람이 칼로 그 형제를 칠 것이며

22.내가 또 전염병과 피로 그를 심판하며 쏟아지는 폭우와 큰 우박덩이와 불과 유황으로 그와 그 모든 무리와 그와 함께 있는 많은 백성에게 비를 내리듯 하리라

23.이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위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설교>

이스라엘이나 이방 나라를 향한 심판의 말씀을 대하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한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 내용이나 수준을 크게 초월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의 내용이나 수준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종교적이라는 기준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이 세 기준을 초월한 신앙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감을 잡지도 못하는 형편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의 말씀도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 있어서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합니다. 특히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긴 것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하는 것이 크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심판이 우상 섬김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한 생각이 자칫 그들과 우리를 종교적 비교를 하는 것으로 그치게 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한 비교로 인해서 심판을 받은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했거나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 실패한 사람들이고 우리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신앙의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잡하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기준과 시각으로 보지 못하고 감지하지 못하는 신앙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23절에 보면 “이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위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러 나라는 이스라엘을 치러 온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을 포함해서 그들과 함께 한 여러 족속을 지칭합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나라로 확대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땅을 치러 온 곡에 대해 노여움을 나타내시고 19-22절의 내용처럼 그들을 심판하시는 목적은 단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거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박해하는 것에 대한 징벌이 아니라 23절이 말씀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함과 거룩함을 나타내어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내용들은 구절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신앙에 대해서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족하실 만한 어떤 일을 해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그것을 신자의 본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거나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께 뭔가 드리는 것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훨씬 더 깊은 것은 더 수준 높은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로서는 할 수 없고 가능하지 않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가능한 다른 뭔가를 의미합니다. 그것을 심판의 말씀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15,16절을 보면 “네가 네 고국 땅 북쪽 끝에서 많은 백성 곧 다 말을 탄 큰 무리와 능한 군대와 함께 오되 구름이 땅을 덮음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 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눈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이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이 곡을 이끌어다가 이스라엘을 치게 하시는 목적을 이방 사람의 눈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심판을 포함하여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어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한 뜻이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과 다른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그 날에 곡이 이스라엘 땅을 치러 오면 내 노여움이 내 얼굴에 나타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합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얼굴이 없으신 분입니다. 몸이 없으시니 얼굴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면 곡이 이스라엘 땅을 치는 것에 대한 노여움이 하나님의 얼굴에 나타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사람에게 있어서 얼굴은 그 사람을 알고 판단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람의 희노애락이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얼굴 생김새나 인상, 표정에 의해 호감을 주기도 하고 아니면 비호감으로 낙인찍혀 외면 받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얼굴에 대해서 나름대로 고정관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착한 사람은 얼굴에서 선함과 인자함이 드러난다는 것이고 반대로 악한 사람은 얼굴 표정 또한 무섭고 험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라고 하면 가장 인자한 표정을 한 얼굴로 그리는 것입니다.

 

 

천사의 얼굴을 그리라고 해도 역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상상의 세계에서는 무섭고 화가 나 있는 천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마귀의 얼굴은 최대한 악마적 표정의 모습으로 그릴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상상하는 마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만약 하나님의 얼굴을 상상해서 그려보라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모습의 얼굴로 그리고 싶습니까? 예수님처럼 사랑과 인자함이 넘쳐나는 얼굴로 그리시겠습니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사랑이 많으시고 인자하심 하나님께 어울리는 얼굴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노여움이 얼굴에 나타나신다고 말씀합니다. 분노와 노여움으로 가득한 얼굴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노여움은 이스라엘 땅을 치러온 곡에 대한 것이라고 하면서 여러분 자신에 대한 노여움이 아니라고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곡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을 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배격하고 업신여김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눈에 보이는 힘을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배격한 채 살아가는 우리와 무관하다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19절에 보면 “내가 질투와 맹렬한 노여움으로 말하였거니와 그 날에 큰 지진이 이스라엘 땅에 일어나서”라고 말합니다.

 

 

질투와 맹렬한 노여움이란 하나님의 질투에 의한 노여움이란 뜻입니다. 질투에 의한 노여움으로 이스라엘에 큰 지진이 일어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큰 지진으로 인해서 바다의 고기들과 공중의 새들과 들의 짐승들과 땅에 기는 모든 벌레와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떨게 될 것이고 모든 산이 무너지며 절벽이 떨어지며 모든 성벽이 땅에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21,22절에서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내 모든 산 중에서 그를 칠 칼을 부르리니 각 사람이 칼로 그 형제를 칠 것이며 내가 또 전염병과 피로 그를 심판하며 쏟아지는 폭우와 큰 우박덩이와 불과 유황으로 그와 그 모든 무리와 그와 함께 있는 많은 백성에게 비를 내리듯 하리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는 이런 내용이 무슨 뜻인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모두 과거의 일로 치부하기 십상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그 내용들을 현재에서 확인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의 세상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없이 고요하고 평화롭게 잘 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언제 이 말씀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지금의 나와는 상관없는 내용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이거나 아니면 언제 있을지 모르는 세상 마지막 때 일어날 일로 미뤄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뭐라 하든 현재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현재를 즐겁게 누리면 된다는 생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질투와 맹렬한 노여움에 대해서도 덤덤한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바다의 고기들과 공중의 새들과 들의 짐승들과 땅에 기는 모든 벌레와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내 앞에서 떨 것이라고 말씀하지만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라는 구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를 살아가면서 도무지 하나님의 질투와 노여움이 나타난 얼굴을 확인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독교인이라는 우리도 성경은 성경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라는 식으로 오직 날 위한 인생살이에 몰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과연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감히 단언하건대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을 잘 아는 척 행세하고 깝죽거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투에는 ‘너만 사랑하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치러 오는 곡에 대한 노여움은 이스라엘만 사랑하는 사랑에 의한 노여움입니다. 그러면 사랑을 받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너만 사랑하겠다는 것에는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요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한 대상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사랑을 받는 자 역시 섬김의 대상이 한 분으로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랑 신부의 참된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질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질투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노여움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땅을 치는 곡 또한 하나님의 질투와 노여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왜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질투와 노여움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평생을 바쳐서 하나님을 믿었는데 왜 이런 일이 있게 합니까?’라는 불평과 원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었으니 나를 도와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힘든 일이 있으니 하나님을 믿는 것도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라는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자기 필요를 위해 살아온 인생이었을 뿐임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신 4:24-26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일으키면 내가 오늘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란 하나님의 사랑은 질투하시는 사랑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만 할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으로만 고정되어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우리 자신들이야 말로 악을 행하고 하나님의 노를 일으키는 망해야 할 대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질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다른 것을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노여워하고 심판하시고 버려버리시는 것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랑의 대상을 찾으시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끝까지 ‘너만 사랑하겠다’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만 사랑하신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하고 있다는 생각들이 그러한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한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한다는 모든 일들도 결국에는 자기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봉사, 구제, 헌신, 전도, 선교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마치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처럼 과시하고 스스로 만족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 증거 중에 하나가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을 끌어다가 이스라엘을 치게 함으로 하나님을 아는 이스라엘로 새롭게 세우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스라엘을 친 이방인을 심판하심으로써 하나님을 나타내고 알게 하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곡이 이스라엘을 침으로 해서 큰 지진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서 모든 산이 무너지며 절벽이 떨어지고 모든 성벽이 땅에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전염병과 피로 그를 심판하여 쏟아지는 폭우와 큰 우박덩이와 불과 유황으로 그와 그 모든 무리와 그와 함께 있는 많은 백성에게 비를 내리듯 하겠다고 합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는 장면을 연상하게 하고 계 20:7-10절에서 말씀하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것을 세상이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평화롭고 조용하며 성경이 말하는 심판과 무관한 현재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세상을 말씀의 시각에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심판 속에 던져져 있습니다.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는 영원한 죽음의 세계로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말합니다(계 20:14). 그런데 이러한 실상에 대해 말해주는 성경을 외면하기 때문에 지금의 현재를 조용하고 평화롭다고만 생각하며 자기 필요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질투의 사랑으로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맞도록 하나님을 아는 자로 세워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대하고 원하고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충만이 되는 그 자리에 이르도록 까지 우리를 그냥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불만이라면 아직도 하나님의 질투를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마음씨 좋은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하나님만 상상할 뿐이지 노여움이 나타난 하나님의 얼굴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을 아는 자로 바꾸기 위해서 모든 일에 간섭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을 하나님의 열심과 자비와 의로우심으로 간섭하시면서 기어이 하나님의 질투의 사랑으로 감사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게 하시고 무거운 짐을 지게도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이고 거룩하심입니다.

 

 

세상은 둘째 사망으로 끌려가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의 피로 인한 용서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고요이고 평강입니다. 이 고요와 평강에 눈을 뜨게 되고 이것을 소망하게 되는 것을 예수 안에서 허락된 기적으로 여기고 신자가 누리는 큰 영광으로 알며 그것으로 자기 신앙을 점검할 줄 아는 그가 하나님을 아는 신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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