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9.24 17:53

(95강) 하몬곡 골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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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9:11-16http://onlycross.net/videos/eze/eze-39111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1.그 날에 내가 곡을 위하여 이스라엘 땅 곧 바다 동쪽 사람이 통행하는 골짜기를 매장지로 주리니 통행하던 길이 막힐 것이라 사람이 거기에서 곡과 그 모든 무리를 매장하고 그 이름을 하몬곡의 골짜기라 일컬으리라

12.이스라엘 족속이 일곱 달 동안에 그들을 매장하여 그 땅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

13.그 땅 모든 백성이 그들을 매장하고 그로 말미암아 이름을 얻으리니 이는 나의 영광이 나타나는 날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4.그들이 사람을 택하여 그 땅에 늘 순행하며 매장할 사람과 더불어 지면에 남아 있는 시체를 매장하여 그 땅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 일곱 달 후에 그들이 살펴 보되

15.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땅으로 지나가다가 사람의 뼈를 보면 그 곁에 푯말을 세워 매장하는 사람에게 가서 하몬곡 골짜기에 매장하게 할 것이요

16.성읍의 이름도 하모나라 하리라 그들이 이같이 그 땅을 정결하게 하리라

 

 

<설교>

우리가 인생을 나름대로 지혜롭게 산다고 자부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미련하고 어리석게 삽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진심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실히 드러납니다. 타인보다 더 우월하고 폼 나는 삶을 살고 싶은 억제할 수 없는 욕망에만 붙들려 살면서 종국에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인생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미련함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요즘 전국이 지진으로 인해 불안해 하지만 지진의 진원지인 경주보다는 덜할 것입니다. 여진이 400회 이상이 되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현실에서 불안이 일상이 된 경주 사람들 가운데는 “두 발 뻗고 잠을 자고, 아이와 웃으며 밥 먹고 이야기 하는 등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던 것들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우리가 평생을 노력해서 이만큼 이루었다고 자신하고 스스로를 대견해 하는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진심으로 소중하고 필요한 것은 땅에 속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에 속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지혜는 세상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이고 그것을 소망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지혜가 성령의 오심으로 있게 되는 것이고 신자는 성령의 지혜로 인생을 바르게 판단하면서 잠시 잠깐의 자랑과 즐거움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됨이고 이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을 하나님이 세워 가시는 것입니다.

 

 

고후 4:18절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처럼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일은 잠깐입니다. 그것이 부요이든 비천이든 잠깐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자랑할 것도 낙심할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부요든 비천이든 자신에게 허락된 삶의 위치에서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주목하고 소망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이 약속되어 있으며 그 약속을 우리에게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믿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 위에 굳게 서 있는 신자는 발 딛고 있는 땅이 흔들려도 영원한 것을 향한 소망은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믿음의 사람으로 사는 것보다 세상에서 우월한 사람으로 사는 것을 원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주체할 수 없는 욕망입니다. 이것이 해결되는 길은 신자의 우월성이 무엇으로 드러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왜 미련한 것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땅을 침략한 곡과 그 무리들이 하나님에 의해 어떻게 심판을 받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하지만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땅을 침범한 것에 대한 보응의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본문을 그렇게 이해하게 되면 이 내용이 현재의 우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난감해지게 됩니다. 불신자가 신자를 괴롭힌다고 해서 하나님이 보응하여 심판하는 것이 현재의 삶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면 “이스라엘 성읍들에 거주하는 자가 나가서 그들의 무기를 불태워 사르되 큰 방패와 작은 방패와 활과 화살과 몽둥이와 창을 가지고 일곱 해 동안 불태우리라”고 말합니다.

 

 

곡과 그 무리들의 무기를 일곱 해 동안 불태운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침범한 무리들이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였음을 알게 합니다. 하지만 비록 그들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이스라엘 땅을 침범 했다 할지라도 이미 3절에서 “네 활을 쳐서 네 왼손에서 떨어뜨리고 네 화살을 네 오른손에서 떨어뜨리리니”라고 말씀한 것처럼 하나님에 의해서 그들의 무기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되어 불태워질 뿐입니다.

 

 

여기서 무기를 일곱 해 동안 불태웠다는 것은 실제로 7년 동안 무기를 불 태웠다는 것보다는 일곱이라는 수가 의미하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곱은 하나님의 창조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온전히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의미의 숫자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스라엘이 곡과 그 무리를 이기고 무기를 일곱 해 동안 불태웠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승리가 온전히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일곱이라는 수가 인간의 힘과 열심히 개입되지 않은 온전히 하나님의 행하심을 의미하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완전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12절을 보면 “이스라엘 족속이 일곱 달 동안에 그들을 매장하여 그 땅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스라엘이 죽인 사람들이 일곱 달 동안 매장할 정도로 많았다는 것 역시 실제로 일곱 달에 걸려서 시체를 매장했다기보다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온전히 하나님이 행하신 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러한 내용만 보면 이 같은 일들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현실적으로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거나 조롱하고, 믿는 자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심판해 버리신다면 믿음의 권위와 함께 신자의 위상이 세상 사람들 속에서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본문처럼 핍박하는 사람을 신자가 직접 죽이는 것이 아니라 병에 걸려 죽게 하시거나,사건 사고로 인해서 장애가 있게 하시거나, 하는 일을 실패하게 하는 방법 등을 통해서 신자를 핍박하는 것에 대한 보복을 하나님이 행해주신다면 신자를 함부로 조롱하지 못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간혹 목사들 가운데는 그럼 말로 교인을 협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의 종인 목사를 반대하거나 목사가 하는 일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징벌하셔서 병에 걸려 죽거나 사업이 망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이 성경과 상관이 없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우리에게 나타내고 있다는 공통성이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본문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곡과 그 무리를 심판하신다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이다’라는 결론에만 머문다면 성경을 인건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단편적으로만 보는 우를 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그 날에 내가 곡을 위하여 이스라엘 땅 곧 바다 동쪽 사람이 통행하는 골짜기를 매장지로 주리니 통행하던 길이 막힐 것이라 사람이 거기에서 곡과 그 모든 무리를 매장하고 그 이름을 하몬곡의 골짜기라 일컬으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곡을 위하여 하신 일은 매장지를 주신 것입니다. 매장지는 바다 동쪽 사람이 통행하던 골짜기인데 바다 사람이 통행을 했다면 이는 무역을 위한 통로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좁은 골짜기가 아니라 아주 넒은 골짜기로 생각되는데 그 골짜기의 길이 막힐 정도로 곡과 그 모든 무리를 매장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많은 대군이었는가를 알게 합니다. 이처럼 곡과 그 무리들이 매장된 곳을 ‘하몬곡 골짜기’로 일컫게 하십니다. ‘무리의 골짜기’란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곡과 그 무리들을 어떻게 다르게 대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비록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곡과 그 무리를 치고 크게 승리하게 하시는 것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이스라엘 또한 바벨론에 의해 정복을 당하고 비참한 신세가 되어 고통을 겪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과 같은 승리가 이스라엘에게 천편일률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신앙이 바를 때 승리하고 바르지 않을 때 심판받는 것으로 확실하게 구분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많은 부분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신앙이 바를 때 승리하게 하시는 것도 있지만 본문에서의 승리는 이스라엘의 신앙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신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해서 정신을 차리고 바른 신앙으로 고쳐졌기에 승리하게 하신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이 바르면 복과 은혜를 베푸시고 신앙이 바르지 못하면 징계하시는 방식으로 일하실까요?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그런 시각에서 바라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을 받으려면 바른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전형적인 알미니안적 사고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행함에 초점과 기준을 둔 비복음적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곡과 그 무리들을 어떻게 대하시는가 하는 것은 그들의 매장지로 주신 하몬곡 골짜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몬곡 골짜기는 말 그대로 시신을 매장하는 매장지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죽음의 골짜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종결된 것입니다.

 

 

반면에 37장에서 하나님이 에스겔을 데리고 가서 마른 뼈로 가득한 골짜기 가운데 두신 일을 아실 것입니다. 마른 뼈로 가득한 그 골짜기 역시 표면적으로는 공포스러운 죽음의 골짜기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에스겔이 본 골짜기나 하몬곡의 골짜기는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에스겔이 본 골짜기의 마른 뼈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살아났고 생기가 들어가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함께 하나님이 행하실 생명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러한 자신들의 본질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11절에서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 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고 말한 것처럼 자신들이 처한 형편을 바라보면서 소망이 없다며 낙심한 것입니다.

 

 

이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7:14)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몬곡의 골짜기에 매장된 사람들과 다른 점입니다.

 

 

곡과 그 무리가 이스라엘 땅을 침범한 것은 이스라엘을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땅을 자신들이 능히 정복할 수 있는 땅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힘으로 여긴 무기들은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많은 수의 군대 역시 쓸모가 없습니다. 결국 모두가 죽음으로 끝날 뿐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죽은 자인 것은 맞지만 그들에게는 생명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과 백성 아닌 자의 다른 점입니다.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내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12절의 “이스라엘 족속이 일곱 달 동안에 그들을 매장하여 그 땅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는 구절입니다.

 

 

이스라엘 땅을 침범하여 죽게 된 자를 매장하여 땅을 정결하게 하라는 것은 14절에서도 “그들이 사람을 택하여 그 땅에 늘 순행하며 매장할 사람과 더불어 지면에 남아 있는 시체를 매장하여 그 땅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언급되고 있고, 16절에서도 “성읍의 이름도 하모나라 하리라 그들이 이같이 그 땅을 정결하게 하리라”는 말씀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죽은 자를 매장하는 것은 단지 적군을 불쌍히 여겨 그 시신을 매장해주는 도의적인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땅의 정결, 즉 거룩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입니다. 이 땅의 특징은 아무나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이 약속하셨다는 이유만으로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이 들어가게 하신 자만 들어갈 수 있었고 그 땅에 거하는 이스라엘은 그 같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허락된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외면하고 자신의 힘과 방법과 열심을 동원해서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하는 속성을 드러낸다면 약속의 땅은 더렵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땅을 더럽힌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을 겔 36:17절에서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고국 땅에 거주할 때에 그들의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행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곡과 그 무리들은 이스라엘을 자기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 바라본 것처럼 그 땅 역시 얼마든지 자기들의 힘으로 자기 것으로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 의해 땅이 더럽혀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죽이고 그 시신을 매장하게 함으로 땅을 정결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땅을 더럽힌 이스라엘 역시 죽어야 할 자들입니다. 이것을 골짜기의 마른 뼈로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처럼 죽어야 할 인간을 살리신다는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완성 안에 있는 신자,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에게서는 죽은 자인 자신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한 기쁨과 감사가 나올 뿐이지 자신의 힘으로 행한 그 어떤 일도 내 놓지 않게 됩니다. 아예 자신이 행한 일이라고는 죄 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거하게 된 예수 안이라는 땅을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세상은 신자를 자신들과 같은 존재로만 바라봅니다. 똑같이 생존을 위해 일하고 욕망으로 살아가는 존재로 보이기 때문에 당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선택하신 신자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신비하고 놀라운 섭리에 붙들려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당사자조차 자신을 하나님의 언약의 시각에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과 동일한 시각과 기준으로 자신을 보면서 자신의 초라함에 낙심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은 은혜의 땅입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거룩한 땅입니다. 우리 역시 은혜를 알지 못한 죽은 자였을 뿐이지만 그런 우리를 살리신 생명의 사건에 마음을 두게 하시고 은혜를 아는 자 되게 하셔서 예수 안에 붙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 은혜가 크고 놀랍기 때문에 신자는 어떤 형편에서도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늘의 것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러한 사람으로 붙들어 놓기 위해 일하십니다. 때문에 신자는 우리가 딛고 사는 땅이 흔들린다고 해도 영원한 생명을 향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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