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10.01 17:43

(96강) 하나님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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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9:25-29http://onlycross.net/videos/eze/eze-392529.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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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5.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사랑을 베풀지라

26.그들이 그 땅에 평안히 거주하고 두렵게 할 자가 없게 될 때에 부끄러움을 품고 내게 범한 죄를 뉘우치리니

27.내가 그들을 만민 중에서 돌아오게 하고 적국 중에서 모아 내어 많은 민족이 보는 데에서 그들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낼 때라

28.전에는 내가 그들이 사로잡혀 여러 나라에 이르게 하였거니와 후에는 내가 그들을 모아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 한 사람도 이방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내가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 줄을 알리라

29.내가 다시는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내 영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본문>

성경을 하나님의 귀한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읽게 되면 감동보다는 나와는 상관없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을 많이 경험할 것입니다. 성경의 내용이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과 괴리감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현실에서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는 가를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필요한 것은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평안한 삶이든 힘든 삶이든, 부요하든 가난하든 신앙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신앙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며 세상에 흔들리기 쉬운 하나님의 백성을 붙들어 하나님과의 관계에 굳건히 세워 놓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이 지금의 현실과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수천 년 전의 시대든 지금의 시대든 동일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도 세상 속에서의 자신의 삶에 더 크게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돈과 건강만 있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세상의 사고방식에 함께 치우쳐 돈과 건강을 확보하기 위한 삶에 매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돈과 건강을 추구하는 것을 잘못된 것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돈과 건강이 없으면 삶은 분명 힘들어지고 어려워지며 고통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누구든 돈과 건강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저 역시 동일합니다. 이러한 삶을 누가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문제로 삼고자 하는 것은 돈과 건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의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즉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결국 행복의 조건을 돈과 건강에 두고 그것만 있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큰 문제로 부각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필요로 해서 자신의 삶에 하나님을 모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우리를 장악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만약 자신의 필요에 의해 자신이 하나님이란 신을 모신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고통으로 떨어지면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를 삶의 평안에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며 이러한 종교의 세계에는 하나님으로 인한 위로와 평강이 있음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다스리는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고통을 겪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가를 통해서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에스겔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시각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다스리시는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28절에 보면 “전에는 내가 그들이 사로잡혀 여러 나라에 이르게 하였거니와 후에는 내가 그들을 모아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 한 사람도 이방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내가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 줄을 알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이 증거 하는 대로 이스라엘이 무너지고 포로 된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돌아오게 되는 것 또한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어쨌든 돌아오게 하셨으니 된 것 아니냐’며 포로 되어 고통을 겪게 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 삼자의 입장에서의 생각일 뿐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고통을 겪었던 것을 ‘어쨌든 해방되었으니까 된 것 아니냐’라는 말로 가볍게 생각하고 지나칠 수 있을까요? 식민지 시대를 직접 겪지 않은 세대는 가볍게 생각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고통의 그 세월을 겪은 세대는 그럴 수 없습니다. 고통을 겪었던 세월이 삶에 가시처럼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포로 된 것을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할 때 어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자 개인에게, 그리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는 말로 덮으려고 합니다. 집에 불이 난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지진이 발생해서 집이 무너지고 다친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쉽게 말해 버립니다.

 

 

그러면 28절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을 포로 되게 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까? 둘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이 여호와가 자기들의 하나님인 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여호와가 자기들의 하나님이신 줄을 알게 되고 섬기게 되는 하나님의 세계를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은 여호와의 말씀을 통해서 이 세계를 바라보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것입니다. 단순히 고통 속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포로 되게 하셨다가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무너뜨리고 백성들을 포로로 삼은 일은 단순한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일으키신 계시가 됩니다. 이것이 세상의 역사를 바라보는 신자의 시각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일에도 우연이 없고 사람의 권력과 뜻에 따라 되어진 일이 아니며 오직 뜻을 세우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 되어진 일로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로잡혀 포로 되게 하신 것은 그들의 범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23절에서 “여러 민족은 이스라엘 족속이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혀 갔던 줄을 알지라 그들이 내게 범죄하였으므로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고 그들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겨 다 칼에 엎드러지게 하였으되”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포로 된 것이 그들의 죄로 인한 것이라면 곡의 힘과는 무관한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곡과 그 무리들에게는 자기들의 힘에 의해 이스라엘이 무너지고 포로된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이것이 이방인이 세상일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는 그들은 모든 일을 인간의 힘에 의해 흘러가는 역사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신자에게는 역사가 단순히 인간에 의해 일어나는 사건으로 인식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개입과 손길에 의해 장악되고 다스려지는 세상임을 믿는다면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지는 역사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각입니다.

 

 

“여러 민족은 이스라엘 족속이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혀 갔던 줄을 알지라”는 말씀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이스라엘의 패망과 포로된 것을 보는 여러 민족들은 그 모든 것을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힘에 의한 역사로만 봤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곡과 그 무리들의 무기를 일곱 해 동안 불태우고 시신을 일곱 달 동안 매장하게 하심으로 곡의 힘에 의한 일이 아니었음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사로잡혀 간 것이 곡과 그 무리들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들이 이스라엘에 의해서 그렇게 처참한 일을 겪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힘이 없는 민족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곡과 그 무리들의 심판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사로잡혀 간 것은 그들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음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방인은 모든 일을 인간의 힘에 의해 되어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이 있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사고방식으로 고정된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신자가 가져야 할 사고방식이 무엇인지는 잘 아실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 개입을 믿는 신자로서 ‘세상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다스려진다’가 믿음으로 자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역사가 하나님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믿음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방인의 사고방식에 치우쳐 이방인과 동일하게 ‘힘이 있어야 된다’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이 있고 건강이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이방인의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먹고, 마시고, 입는 자기 생활에 대한 문제를 들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신자라고 하면서도 이방인이 신에게 구하는 것처럼 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사도 바울이 여러분 앞에 있다면 사도바울과 얘기하는 것이 편하겠습니까 아니면 믿지 않은 이웃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이 편하겠습니까? 사도 바울보다는 이웃 사람일 것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우리의 사고방식이 세상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복음을 듣는 것이 편하지 못하고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길을 고집합니다.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방인들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면서 그 힘을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들처럼 살고 싶은 욕망이 있기에 한편으로는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이 가는 길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이방인을 바라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에서 초라함을 보면서 이방인처럼 되고 싶은 마음에 우상을 끌어들여 하나님께 범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여러 나라에 사로잡혀 가게 하셨고 후에는 다시 그들을 모아 한 사람도 이방에 남기지 않고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이 변화되어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스라엘의 변화로 인해 돌아오게 하신 것이라면 그들은 자신의 변화를 자랑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로잡혀 갔을 때의 이스라엘 그대로라면 초점은 고국 땅에 돌아올 자격이 없는 그들을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신앙생활 잘하는 종교인의 집합소가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세계가 말씀드린 것처럼 종교인의 집합소와 같은 수준이라면 자신의 신앙이 우월하다는 자기 자랑으로 가득한 모습만 가득할 것입니다.

 

 

25절에 보시면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사랑을 베풀지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사로잡혀 갔을 때나 돌아올 때나 동일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런 그들을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는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에 감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그들이 그 땅에 평안히 거주하고 두렵게 할 자가 없게 될 때에 부끄러움을 품고 내게 범한 죄를 뉘우치리니”라고 말하고 29절에서는 “내가 다시는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내 영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베풀어 돌아오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평안히 거하게 되고 두렵게 할 자가 없게 될 때 부끄러움을 품고 죄를 뉘우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을 알게 된 사람에게서 나타나게 되는 반응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29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쏟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죄로 가득한 자신에게 베풀어진 사랑으로 인해 부끄러워지게 됩니다. 이것이 곧 죄를 안다는 것이고 이들이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영원히 사망에 사로잡혀 있어야 할 자신을 사망에서 구출하여 돌아오게 하신 사랑과 은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당연히 나타나게 되는 신자 됨 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자 됨을 인간의 종교성을 기준하여 행위로 규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신자 또한 믿음의 의미를 자신의 행위 속에서 찾지 않아야 합니다. 나 같은 자에게도 사랑을 베푸셔서 나를 사로잡고 있는 세력으로부터 구출하여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어떻게 반응되어야 하는가에서 믿음의 의미, 본질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쏟아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더러움과 범죄로 인하여 그들에게 얼굴을 가리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24절). 얼굴을 가리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차단된 어둠의 세계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차단되어 영광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곧 어둠의 세계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 31:18절에서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시는 얼굴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더러움과 범죄와 상관없는 거룩한 존재가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일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의 피 흘림의 결과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된 빛의 세계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는 어둠의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으로 인해 누리게 된 복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어야 할 어둠의 자식들입니다. 그럼에도 이 같은 사실을 늘 잊고 삽니다. 그래서 조금만 힘들어도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다는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사로잡힌 우리를 돌아오게 하신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러움과 악행으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자를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하시고 구원하신 사랑에 마음을 두지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현실의 문제로 원망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성령을 받음으로 인해서 자신에게서 드러나는 그 모든 것으로 인해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죄를 알게 되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세계를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봄으로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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