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10.08 17:35

(97강) 이상으로 본 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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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0;1-4http://onlycross.net/videos/eze/eze-400104.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우리가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에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2.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에 이르러 나를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에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3.나를 데리시고 거기에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더니

4.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

 

<설교>

신자는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보게 됨으로써 감사하게 되며 그 사실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아멘’으로 반응합니다. 아마 구원, 감사, 전하는 자, 이러한 단어만 생각하면서 말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이 홀로 이루셨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본다는 것은 구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능할 수밖에 없는 자기 존재를 인식하며 구원이라는 기적의 사건을 이루신 하나님의 권능을 감사하며 높이게 됨을 의미하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는 말씀처럼 자신이 알게 되고 보게 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신자의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한다’는 것은 흔히 말하고 알고 있는 전도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단지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기 위해 전하는 차원의 전도가 아닙니다. 교회를 출입하여 교회인이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 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기독교인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자기를 위해 신을 찾고 부르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사건, 그 역사하심을 성경이 보여준 그대로 전함으로써 나 같은 자를 구원하신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에 감사하며 찬송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백성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는 차원에서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할 때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반발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인간은 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냐?’가 반발의 이유입니다.

 

 

저는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보게 됨으로써 구원으로 감사하며 구원이라는 기적의 사건으로 증거 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을 전하고 증거 하는 것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이 새 영을 주심으로 하게 되는 것이지 인간의 본래 속성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증거가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냐?’라며 반발하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해야 할 일에 중점을 두게 되면 자연히 자신이 한 일을 드러내고 자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도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으로 포장을 하겠지만 그 속은 인간의 공로와 자랑이 담겨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함이나 성품 등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이루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자신의 의를 잘라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성경의 중심 내용이 하나님의 행하심, 하나님의 이루심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어렵다기보다는 아예 불가능하다고 해야 합니다. 겔 36:26절의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지 않으시면 안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그와 같은 내용을 접할 수 있습니다.

 

 

40-48장은 에스겔서의 마지막 부분으로 성전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전의 구조와 규모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성전이 무너지고 없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세우신 새 성전을 에스겔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우리가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에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라고 말합니다.

 

 

에스겔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된지 25년째 해, 예루살렘 성이 함락 된지는 14년이 지났을 때 여호와께서 이상 중에 에스겔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셔서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십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거기에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읍 형상 같은 것은 성전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성전을 환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에스겔은 성전에서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되고, 그 사람에게서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4절)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이고, 5절부터는 측량한 성전의 구조와 규모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에스겔이 본 놋같이 빛난 사람은 천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사가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서 있고, 측량한 성전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은 성전에 대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전을 측량한다는 것은 성전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때 다시 재건해야 할 성전의 모형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완성된 성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이상 중에 성전을 보는 때가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후 14년이 넘었다면 성전 또한 무너지고 없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는 성전이 없는 데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이 완성되어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을 보여주시면서 에스겔에게 하신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보여주신 성전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마음으로 생각하라고 하시면서, 본 것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에스겔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가 분명해 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성전을 본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이상 중에 보여주신 성전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성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성전을 보여주시고 본 것을 이스라엘에게 전하라고 하셨다면 하나님이 보여주심으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된 신자가 할 일은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본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봄으로써 구원에 속하게 된 신자가 할 일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말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신자의 할 일을 너무 약화 시키거나 축소시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신자의 할 일은 마치 하나의 설계도로 건축한 건물처럼 동일합니다. 봉사, 구제, 전도, 선교 등등 하나같이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혹 하나님이 보여주신 성전에서 봉사, 구제, 전도, 선교와 같은 일들이 신자의 할 일로 드러난다면 당연히 그것을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살펴보면 알겠지만 하나님이 보여주신 성전은 그 같은 일들을 신자의 할 일로 증거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말에 사람들은 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크게 반발하게 됩니다. 현대 기독교에서 신자가 실천해야 할 가장 중심적이며 중요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들을 모두 부정한 듯한 의미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계속 설교를 들어온 여러분도 쉽게 납득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마치 봉사, 구제, 전도, 선교, 그 모든 것들이 신자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앞에서 말씀드린 내용들이 신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그 일을 하기 위해 얼마나 힘썼습니까? 솔직히 여러분의 모든 관심은 개인의 삶으로 집중되어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나 구제, 전도를 신자가 해야 할 일로 믿는다 해도 전심으로 그 일에 온 마음을 집중하지 않을 것이고 또 특별히 열심히 행한다고 말할 만큼의 실천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행함을 부정하는 듯한 말을 들으면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것은 어떤 마음일까요?

 

 

성경이 신자의 할 일로 증거 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 말라거나 하면 안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을 행한 것으로 자신이 신자이고 신자답게 살고 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 되게 하신 이유가 지금의 한국교회가 신앙생활로 생각하는 것들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기 위해 고통의 길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 중심이 성전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들은 건물로 세워진 보이는 성전이 하나님의 거룩한 전이었고 그 성전에서 제사하고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을 행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성전을 세우시고 제사하게 하신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고 알아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습니다. 율법대로 행하는 자기들의 실천으로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고 백성으로 살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제가 볼 때는 이러한 이스라엘이나 지금의 한국교회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상 중에 보여주신 성전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성전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해방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하여 지은 2차 성전이나, 2차 성전이 무너진 후 헤롯이 지은 3차 성전도 에스겔이 이상 중에 본 성전과는 같지 않습니다.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이 땅에 성전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고, 성령이 오심으로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할 교회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성전을 측량하는 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에 의해서 지어져 완성된 참된 성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에스겔 시대의 이스라엘에게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성전입니다.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 관계에서 생각한다면 완성된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단 한 치의 부족함이나 다른 점이 없이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스겔은 자신이 본 성전을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완성하신 성전이 있음을 전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성전은 성전이 아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성전은 부족함이나 모자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각이나 뜻은 물론이고 인간의 열심, 헌신 또한 요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것으로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이 성전에 대해 인간이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성전이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됨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매일 반복됩니다.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조금 부족하게 만드신 후에 ‘나머지는 너의 행함과 실천으로 채워서 내가 기뻐하는 인간이 되어라’고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않습니다.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이 죄를 생각하면서 부족한 존재임을 생각하는 것이면 좋겠지만 타인의 행함과 실천을 비교하면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국 행함과 실천으로 자신의 부족을 채우려고 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사건에서 멀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성전을 보여주시는 의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찾아내서 고치라거나 벽돌이라고 한 장 에스겔 손으로 얹어서 열심과 정성을 보태라는 것이겠습니까? 아마 누구도 본문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이 땅에 하나님이 세우신 참된 성전으로 보내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모든 일에는 우리가 고쳐야 하거나 보태야 할 것은 없다는 것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신앙을 위해서 열심과 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이 무너진 것은 성전 신앙의 실패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성심을 다해서 율법을 실천하고 지키고자 했던 열심과 정성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을 보여주시면서 본 것을 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것을 전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이며 무엇이 실패인가를 깨닫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에 담겨 있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열심과 정성과 헌신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고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것만 용납된다면 결국 남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이 이상 중에 성전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생각했을 때 맺어지는 열매는 은혜입니다. 따라서 에스겔이 본 것을 다 이스라엘에게 전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존재하는 것이 이스라엘임을 증거 하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인간의 열심과 정성은 지워져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열심과 정성을 은혜로 포장해서 자기 자랑을 감추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했습니다’는 말로 인위적인 겸손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은혜 앞에서 모든 것이 지워지고 죄만 드러나는 자기의 실상을 보게 된 신자라면 ‘나는 죄인일 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린 그것을 스스로를 ‘죄인의 괴수’로 고백하는 바울에게서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성전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게 하면서 하나님이 지으신 성전이 능력이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모든 공로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 성전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는 성전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공로와 의가되심을 고백하고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것이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된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하나님 같이 된다면 못할 일이 없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의 인간이 신앙을 명목으로 추구하는 세계입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불가능이 없는 세계를 신앙의 세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구절을 좋아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대해 만족과 감사가 있을까요?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의도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에서 만족을 찾고 신앙을 찾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죄의 세계 일 뿐입니다.

 

 

에스겔이 성전을 보고자 해서 스스로 이상의 상태가 되어 이스라엘 땅으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그를 이끌어 이스라엘로 간 것입니다. 에스겔은 보게 하신 것을 보게 된 것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마음에 두게 된 것 역시 하나님의 이끄심입니다. 그 은혜만을 전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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