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10.15 15:38

(98강) 성전 바깥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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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0:17-19http://onlycross.net/videos/eze/eze-40171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7.그가 나를 데리고 바깥뜰에 들어가니 뜰 삼면에 박석 깔린 땅이 있고 그 박석 깔린 땅 위에 여러 방이 있는데 모두 서른이며

18.그 박석 깔린 땅의 위치는 각 문간의 좌우편인데 그 너비가 문간 길이와 같으니 이는 아래 박석 땅이며

19.그가 아래 문간 앞에서부터 안뜰 바깥 문간 앞까지 측량하니 그 너비가 백 척이며 동쪽과 북쪽이 같더라

 

 

 <설교>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으리라 말씀합니다(행 2:21). 이 말씀을 보는 사람들은 ‘주의 이름만 부르면 구원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주의 이름 부르는 것은 자신의 결단과 의지로도 가능하다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인간의 생각과 의지로 가능할까요?

 

 

행 2:17절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만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요구에 의해 받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택함과 뜻으로만 가능합니다. 이것을 이미 욜 2:28절과 32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영을 받음으로만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지 않으면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 확정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구원이 하나님에 의해 확정되었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구원 받고, 성령을 받는 것 또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믿으면서도 구원이 확정되었다는 말에 대해서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구원의 확정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을 거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구원이 확정되었다는 것은 구원을 위해 인간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구원의 확정에 대해 불편한 심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설사 인간이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음을 받아들인다 해도 구원 받은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답하기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행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또한 인간의 무능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착각일 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행할 능력이 없음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받지 못한 증거입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무엇보다 자신의 무능을 밑바닥까지 철저히 자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상으로 성전을 보여 주신 것도 이스라엘의 실상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것처럼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을 보여주시고 천사로 하여금 측량하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해방된 후에 고국으로 돌아가서 다시 세울 성전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측량을 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된 성전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완성된 성전을 보여주시고 굳이 천사로 하여금 측량까지 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하나님에 의해 확정된 자만 성전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구원을 위한 인간의 행위나 그 어떤 노력과도 무관하게 순전히 하나님의 뜻에 위한 확정으로 결정되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성전을 측량한 내용을 보면 혼란만 가중될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성전의 구조나 치수를 보면서 에스겔이 이상 중에 본 성전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언급하는 측량 단위를 안다면 크기는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다 해도 그 모습을 머릿속에 하나하나 그려가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성전의 구조나 크기는 알지 못해서 괜찮습니다. 에스겔이 본 성전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에 중점을 두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측량된 숫자에 의미를 두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제 생각에는 측량된 숫자 하나하나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결국 무리한 해석을 이끌어 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측량된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에스겔이 본 성전은 하나님에 의해서 완벽하게 완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성전을 측량하였으면서도 측량된 크기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성전을 제멋대로 상상해서 자기 마음에 맞는 전으로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가령 5절에 보면 가장 먼저 성전의 바깥 사방 담에 대해 말하는데 그 담의 두께와 높이가 한 장대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담의 두께와 높이에 대해 언급되는 것과 언급되지 않는 것의 차이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담의 두께와 높이가 한 장대로 언급되었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그 두께, 그 높이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성전을 지으셨다면 그 또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완전한 성전입니다. 따라서 성전 앞에서 선 인간은 ‘성전을 왜 이렇게 지으셨습니까?’라는 불만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두께와 높이가 언급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담의 두께와 높이를 각각 제 마음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고 제 마음에 맞는 성전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그렇게 보면 성전의 구조와 함께 그 크기들이 정확하게 언급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성전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 확정된 백성 됨의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에스겔이 본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성전, 즉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이미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세워져 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인간의 어떤 생각이나 희망 사항도 하나님의 구원 방식에 개입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말에 대해 대부분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에 의해 구원되는 것이지 인간의 뜻에 의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 방식을 제시하면 거부하기 십상입니다. 이유는 늘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행함이 무시된다는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에 의해 구원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면서도 그 방식이 자신의 뜻에 맞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인간의 뜻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성령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인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에스겔이 천사에 이끌려 바깥뜰로 들어간 내용입니다. 바깥뜰에서 본 성전 내부는 뜰 삼면에 박석, 즉 넓적한 돌이 깔린 땅이 있고 그 땅 위에 서른 개의 방이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대하게 되는 바깥뜰의 이야기가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계 11:1-2)

 

 

요한계시록에서는 요한에게 지팡이 같은 갈대, 즉 측량하는 도구를 주면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고 합니다.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는 것은 사람을 측량하라는 것인데 사람을 어떻게 측량할 수 있습니까?

 

 

측량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확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를 측량하라는 것은 성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에 의해 확정되어 있다는 뜻이 됩니다.

 

 

고전 3:16-17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을 에스겔의 성전 측량에 빗대어 생각해 보면 ‘너희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하나님의 집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성전으로 일컬음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행위와 실천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오직 성령이 오시고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하나님의 성전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 확정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오실 뿐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것,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 오직 그 이유로 성령이 오시는 것이지 인간 됨이나 그 행실을 보시고 하나님의 기준에 합격한 자에게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경배하는 자를 측량하시는 것은 그 사람을 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항상 자기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하면 구원 받을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지금의 내 실상이 어떻든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측량되어진,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이 백성으로 인정되고 구원받는다는 것이 못미더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 11:2절을 보면 요한에게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에스겔이 들어간 바깥뜰을 측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바깥 마당을 이방인에게 주었고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깥 마당을 측량하지 않는 기간은 마흔 두 달이고 그 동안 이방인들이 거룩한 성을 짓밟도록 두고 보신다는 뜻이 됩니다.

 

 

이방인에게 허용된 바깥 뜰이라고 해서 성전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마흔 두 달 동안 측량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렇게 보면 측량은 하나님에 의해 확정된 하나님의 백성과 백성 아닌 자를 구별하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천사가 성전을 측량하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 완성된 성전을 뜻하면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성전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전이 이방인에게 짓밟히는 기간은 마흔 두 달로 확정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복음은 짓밟히고 배척받으며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구원의 모든 것이 확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드러나는 것은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게 보입니다.

 

 

천국, 영생, 구원 등 하늘의 모든 것은 현재에서 확실하게 드러나지도 확인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다 더 확실한 것을 찾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는 것을 확실한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확정하신 것을 믿지 못하고 자신이 확인한 것을 믿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성령 받지 못한 것이고 성령 받지 못한 자에 의해 복음이 배척받고 고난 받습니다. 이것이 마흔 두 달이 차지 않았을 때의 현실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에스겔에게 성전을 보여주시고 그 성전을 측량하시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게 합니다. 인간의 실패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세운 성전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제사하고 제물을 바쳤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실패한 이스라엘에게 성전을 보여주시는 것은 구원은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 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 그 성전을 중심으로 인간은 둘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성전으로 오신 분으로 인해 자기의 실패를 보게 되고 성전 앞에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음을 알며 성전이 자신에게 구원이 됨을 믿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성전 앞에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인간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자기 힘으로 부지런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성전 안과 밖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 안과 예수 밖의 세상으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예수 밖의 세상은 당연히 멸망으로 끝납니다. 이것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의 시각에서 보면 이 믿음은 불확실한 것을 믿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드러나지 않았고 눈으로 보고 확인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은 신자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보게 됩니다. 자기의 실패를 알지 못하고 그래서 우리의 완성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자신의 열심과 행함에 가능성을 두며 살아가는 세상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밖에 있는 것이고 그것을 멸망으로 바라봅니다.

 

 

이스라엘이 처한 현실에서 본다면 에스겔이 본 성전은 이스라엘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환상일 뿐입니다. 그들을 바벨론에서 나오게 하는 힘이 되지 못하고 현재의 환경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보여주신 성전은 아주 중요한 것을 보게 하고 듣게 하며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은 ‘너희가 만든 성전으로는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간혹 어떤 성경해석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럽다는 말을 듣습니다.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를 하는 사람들마다 자신의 해석이 옳고 성경대로 가르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들으면 이 말도 옳은 것 같고 저 말도 옳은 것 같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의 해석이 옳고 누구의 말이 맞는지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들음으로 자신의 실패를 자각하고 성전으로 오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의 해석이 옳은가를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약 ‘저 목사의 해석이 옳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 목사의 말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사의 설교를 듣고 그 설교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으로 자신은 복음을 알고 있다는 중대한 착각에 빠지는 오류를 초래하게 됩니다. 예수가 아닌 목사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아니라 성전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물론 누구나 예수를 바라본다고 자신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실패자임을 알고 예수를 바라보는 그가 성령 받은 자일뿐입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완성자로 오신 예수를 믿게 됨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자로 여김 받게 됨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자신의 행함을 생각하면서 불안해하지 않을뿐더러 다른 사람보다 많이 받는 상급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용서 받았다는 사실이 기쁨과 감사로 자리할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확정하신 때가 이르러 비로소 성전 바깥뜰이 측량 되며 인간의 믿음과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신 믿음이 어떻게 다른지가 드러나게 됨을 믿으며 불확실한 것 같은 그 길로 갈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측량하신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무엇을 얻고자 함도 아니고 이루고자 함도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완성된 구원의 세계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에 대해 ‘그러면 인간이 할 것이 없는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정말 답이 없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답 외에는 그 무엇도 답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답은 완성자로 오시고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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