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10.22 18:09

(99강) 성전과 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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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0:44-47http://onlycross.net/videos/eze/eze-40444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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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44.안문 밖에 있는 안뜰에는 노래하는 자의 방 둘이 있는데 북문 곁에 있는 방은 남쪽으로 향하였고 남문 곁에 있는 방은 북쪽으로 향하였더라

45.그가 내게 이르되 남쪽을 향한 이 방은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쓸 것이요

46.북쪽을 향한 방은 제단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쓸 것이라 이들은 레위의 후손 중 사독의 자손으로서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 수종드는 자니라 하고

47.그가 또 그 뜰을 측량하니 길이는 백 척이요 너비는 백 척이라 네모 반듯하며 제단은 성전 앞에 있더라

 

<설교>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곧 진리라고 합니다(요 17;17). 그러면 여러분은 진리를 아십니까? 성경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이라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면 진리를 아는 것으로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 진리를 아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진리를 아는 신자로 세상을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진리를 알고 진리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로 사는 것일까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선포하신 것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있는 모든 세상은 비참한 저주 아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신자가 진리를 알고 진리를 믿는다면 세상을 덮고 있는 이 운명까지 분명히 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미래, 세상의 전부를 알고 있는 신자가 왜 세상에 대해서 항상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까? 이것은 진리를 알지 못한 이방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저는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는 허구일 뿐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하나님께 버림받아 피 흘려 죽으신 실제적 십자가가 아니라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증표로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지금의 기독교의 실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구에게든 십자가가 허구가 아니라 실상이라면 그에게 십자가는 큰 권세로 자리할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보다 더 큰 권세로 자리하기 때문에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자랑하고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고백처럼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것은 자기의 것, 즉 자기 손으로 이룬 공로와 업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 전하는 것에만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자신이 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일만이 생명이 되는 가치 있는 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세상의 재물이 복으로 다가오고, 세상의 권세를 힘으로 여기면서 믿음의 세계를 이해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세계는 생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참된 복과 권세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세계에 속한 신자는 세상의 것이 진리를 대신할 수 없음을 알기에 세상을 권세로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다시 묻습니다. 진리를 아십니까? 진리를 아신다고 여기신다면 그 진리가 여러분께 어떤 의미와 가치로 존재하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진리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진리에 대해 무지하고 관심이 없는 상태에서 진리를 안다는 막연한 이해로만 버티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에 진리가 없으면서 진리를 알고 진리로 사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속에 진리가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믿음은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로만 향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향하는 믿음은 없습니다. 인간의 힘과 열심과 능력으로도 향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과 열심으로만 향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행한 일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행하시고 이루신 일만 보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믿음의 세계임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깨닫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세계를 에스겔이 본 성전에서 보고 배울 수 있습니다.

 

 

에스겔은 바깥뜰에서 안뜰로 갑니다. 안뜰에는 바깥뜰의 동쪽 문, 북쪽 문, 남쪽 문과 마주 보는 문이 세 개 있습니다. 그리고 바깥뜰의 문과 안뜰의 문 사이의 거리는 백 척, 52미터가 넘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에스겔이 본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과 규모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천사가 측량한 모든 성전의 크기는 솔로몬의 성전과 다릅니다. 구조 또한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38절에 보면 번제물을 씻는 곳인 방이 있고, 39절에서는 번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잡는 상이 각기 둘씩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45절에서는 안뜰에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쓰는 방이 있고, 46절에서는 제단을 지키는 제사장이 나오는데 이들은 레위의 후손 중 사독의 자손으로서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 수종드는 자로 말합니다. 그리고 47절에서는 성전 앞에 제단이 있음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번제, 속죄제, 속건제, 제사장, 레위 후손, 사독 자손, 제단, 이 용어들은 솔로몬의 성전과 연관이 있습니다. 무너진 옛 성전에서의 제사에 등장하는 것들입니다. 의문이 되는 것은 에스겔이 본 성전에 왜 무너진 옛 성전의 제사에 필요한 것이 등장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의 성전을 무너뜨린 것은 이스라엘의 성전 신앙이 실패했음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번제, 속죄제, 속건제 등의 모든 제사가 실패했고, 제물을 잡아 제단에서 피 흘리며 희생 제물로 바친 이스라엘의 모든 신앙 행위들이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에스겔의 성전에서는 솔로몬의 성전에서 통용되는 것들은 사라져야 합니다. 실패한 구시대의 유물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성전에서는 솔로몬 성전에서처럼 제물을 잡아 희생 제물로 드리는 제사가 없습니다. 솔로몬 성전에서의 제사가 없다면 제사장 또한 필요하지 않습니다.

 

 

히 10:15-7절에 보면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성전은 성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제사가 완성되었기에 번제와 속죄제는 주께서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이는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히 10:8).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는 죄를 없게 하지 못하고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우리는 그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되었습니다(히 10:11-14). 그러므로 다시는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고 예수님이 우리의 큰 제사장이 되시기 때문에 다른 제사장 또한 필요치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여주신 성전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에스겔이 본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솔로몬 성전에서 행해지던 번제, 속죄제, 속건제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그러한 제사로 죄를 없이 하는 일에는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제사가 필요 없으니 제단이나 제사장 또한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에스겔이 본 성전에 그 모든 것이 다시 등장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옛 성전에서 행해지던 것들이 다시 언급되는 것은 실패한 제사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옛 성전에서의 제사가 다시 행해질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율법을 따라 드리는 제사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보게 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다는 것은 ‘나는 왜 실패 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생각하고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을 뜻합니다. 자신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지 못하면서 진리를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실패를 알지 못하면 자연히 자신에게 가능성이 있음을 생각하게 되고, 자신에게 가능성이 있음을 생각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에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성전에 옛 솔로몬 성전의 것이 있는 것은 인간의 실패를 보게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실패를 보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지으신 성전에 안에서 인간이 할 일,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직도 자기 손으로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실패의 길로 가는 것이고 진리로 오셔서 모든 것을 이루시고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처럼 솔로몬의 성전이 실패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무너진 성전을 다시 건축할 이유가 없는데 하나님이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돌아온 이스라엘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학 1:8절에 보면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성전을 건축할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돌아오긴 했지만 아직 삶의 기반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박한 상황에서 성전을 짓게 되면 자신들의 생존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처럼 어려운 형편에 있는 백성들에게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는 것도 아닌데도 말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성전을 건축한다 해도 가장 중요한 법궤가 없다는 것입니다.

 

 

법궤가 언제 어떻게 성전에서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파괴할 때 법궤를 가져갔을 것이라는 등의 추측만 난무할 뿐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법궤가 사라진 내막이 아니라 법궤가 없는 상태에서 성전을 건축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성전 제사의 재개를 위해 성전건축을 명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전을 건축했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어려운 형편에 있는 백성들에게 성전을 건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에게 재물이 있든 성전이 있든 결론은 실패하고 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생존을 위해 성전 건축을 미룬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죽어야 할 존재임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들이 비록 성전의 의미를 오해했다 할지라도 성전을 그들의 생명으로 알았다면 가장 먼저 성전부터 건축했을 것입니다. 성전이 없이는 죽은 존재일 뿐이라고 여겼다면 당연히 생존이 아닌 생명을 위해 성전을 건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전보다는 생존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심을 아십니까? 그러면 여러분께 중요한 것은 생존입니까 생명입니까? 당연히 생명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명보다는 생존을 우선시합니다. 이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돈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인간은 돈이 있다 해도 죽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닌다 해도 죽은 존재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본질을 죽음으로 바라보게 되어야 비로소 생명을 향해 마음이 향하게 됩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죽음을 먼저 보게 합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우리가 에스겔이 본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았다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죽음과 실패를 자각하고 실감하지 않고서는 성전이신 그리스도를 생존보다 귀한 생명으로 여기는 진리의 길로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에스겔의 성전에 솔로몬의 성전을 있게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자는 자신이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이 하나하나 잘려나가는 갈등과 고통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진리로 알고 믿는 것입니다. 자신이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이 잘려나가고 그리스도만 남을 때 그리스도께 온 마음을 두기를 힘쓰게 되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 신자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자신의 죽음을 안고 주를 찾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죽음이 아닌 생존을 안고 주를 찾는 것은 신앙이 아닌 종교입니다. 이들에게는 십자가에 피 흘리신 그리스도가 진리가 아니라 편안하고 부요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그리스도를 진리로 생각합니다. 결국 그런 인간은 그것으로 영원한 실패와 죽음에 갇히게 됩니다.

 

 

건축물로서의 성전이 이스라엘에게 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는 말씀을 표면적으로 해석하여 성전 건축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 성전을 무너뜨리신 하나님이 또 다시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시는 말씀에서 뭔가 맞지 않는 모순을 발견한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두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물은 성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건물을 성전으로 세우게 하시는 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에서 인간이 무엇을 하고 어떤 정성을 다하여 바치든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심을 알게 하십니다. 이것을 에스겔 성전과 솔로몬 성전의 관계로 이해하면 됩니다.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의 생존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가능하면 세상의 것을 좀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삽니다. 말씀 안에서 본다면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일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죽음이라는 저주에 갇힌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것이 인생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것이고 십자가를 알게 된 그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으로 여김 받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 앞에서 사람들은 헌금을 해야 하고, 기도를 해야 하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것들이 신앙생활로 인정되어 그 보상으로 복을 받을 것이라는 헛된 꿈을 꿉니다. 그 성전을 무너뜨림으로써 인간은 자기 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음의 존재임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전은 자신의 본질에 눈을 뜨게 됨으로 지어집니다. 내가 죄인이며 죽음의 존재라는 것을 발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의가 되심을 알게 되는 것이 곧 성전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죽음으로 바라보게 되면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 은총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감사하며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가 그 속에 있어 진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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