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5.04.05 08:17

(부활절)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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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0:19-23http://onlycross.net/videos/20150405.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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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설교>

 

현대를 사는 우리는 수많은 삶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미래 또한 불확실하기에 염려와 근심도 끊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실로 인해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붙들고 있는 신앙이 현재의 실생활에 도움 되기를 원하지만 기독교 신앙에는 우리의 실생활에 적용될 내용은 없습니다. 신앙과 삶이 무관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삶과 무관하다면 신앙은 죽음 이후에 천국가기 위한 수단과 방법일 뿐입니다.

 

 

신자에게 삶은 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즉 신앙은 삶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현실을 살게 하는 것과 신앙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관심은 현실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로 인해서 현실과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성경 이야기에 대해서는 감각이 둔해지기도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 영생 등의 이야기가 실생활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부활도 포함됩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 영생, 부활 등은 신자로서 믿고 소망하면 되는 것이지 실생활과는 거리가 먼 내용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과연 부활이 우리의 현실과 무관할까요? 단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부활한다는 믿음과 소망만 가지고 있으면 되는 것일까요?

 

 

19절의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는 말씀에 따르면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어떤 곳에 모여 문을 닫고 숨어 있었습니다. 이때까지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알았다면 문을 닫고 숨어있지 만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이 무서워 숨어 있었던 것을 보면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않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빈 무덤을 제자들이 확인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가서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덤에 가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는 것을 확인하였지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이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서도, 그리고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전해 듣고서도 믿지 않았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현실의 사건으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현실로 인정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당시 제자들은 지극히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 그대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을 믿고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으며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는 것 역시 믿지 않는, 다시 말해서 자기의 사고방식으로 존재하는 인간 그대로였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고 다만 유대인들이 무서워 한 곳에 문을 꼭 닫고 숨을 죽이며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십니다. 제자들은 주를 보고 비로소 기뻐하게 되고 예수님은 또 이르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먼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쉽게 부활의 주를 증거하는 일을 위해 제자들을 세상에 보낸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세상에 보냄 받게 되고 부활의 주를 증거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생각해 볼 것은 이 말씀을 하실 때의 제자들의 상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이 직접 보지 않았기에 믿지 못한 것이라면 최소한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라도 기억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유대인이 무서워 문을 닫고 숨어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보내어 무엇을 하시겠다는 것일까요?

 

 

인간적 기준으로 보면 제자들은 제자로서 탈락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시자 모두 도망쳤습니다. 가룟 유다는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버렸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유대인이 무서워 숨어 있는 상태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부활의 주를 증거 할 일을 맡길만한 수준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찾아오시는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가 제자들의 수준이나 행동으로 인해 끊어지는 것이 아님이 보여주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제자들의 실력이 요구되지 않은 보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만약 제자들이 제자로서의 실력과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었다면,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을 버리지 못하시고 찾아오셔서 세상에 보내신 것이라면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할 실력도 자질도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예수 믿으라’고 말하고 교회로 데려오는 일에도 부담을 느끼는데 예수님의 희생과 은혜를 증거하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신앙생활 하는 많은 분들이 이런 고민을 안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신 말씀은 흔들리는 우리를 붙들어 주며 고민에 대한 답이 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유대인을 무서워하며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그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도망쳤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자들에 대한 책망입니다. ‘너희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갈 때 어떻게 했느냐? 나의 제자로서 그럴 수가 있느냐?’‘너희는 왜 다시 부활한다는 나의 말을 믿지 못하고 무서워하며 숨어 있느냐?’라는 책망을 먼저 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에 대한 책망은 전혀 없이 가장 먼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신 이유가 그들의 행동에 대해 책망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강을 주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보내시는 것도 단순히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평강과 연결하여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의 그 누구도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만약 누구라도 아버지의 마음에 합한 자가 있었다면 그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라는 말에는 예수님을 아버지의 뜻을 이루실 분으로 여기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말은 무엇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마음에 합한 자임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다면 제자들을 보내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일에 제자들이 부름 받고 보냄을 받는다면 적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도망치고 배반한 사실이나 유대인이 무서워 숨어 있는 못난 모습들은 보냄 받음에 있어서 걸림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과연 예수님은 제자들의 무엇을 보시고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제자들에게는 소위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믿음의 모습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보내시는 것은 제자들을 보내서 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일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자들의 실력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염두에 둔다면 예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우리의 실력과 열심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신 것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앞으로 인생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자신을 위한 길이 될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셨다면 ‘가라’하시고 그냥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뜻하신 길로 가도록 계속 간섭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현실입니다.

 

 

제자들을 보내시는 것은 평강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강은 마음의 평안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평강은 기독교가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평강은 오직 부활의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제자들에게 오신 예수님은 그들의 어떤 잘못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제자들의 잘못에 대해 책망하셨다면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시고 죄 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생명으로 이끄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만난 부활의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어떤 죄도 보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입니다. 이 평강을 나타내고 증거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부활의 예수님은 믿는 것은 죽은 몸이 다시 산다는 기대를 갖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죽은 몸이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소망하게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활 신앙이라고 할수 없습니다. 부활을 내세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현재의 실생활과는 무관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자신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어떻게 신앙생활 하는지를 보면서 스스로 저울질 하면 불안한 마음을 갖기도 합니다. 자기 행동의 정도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 같은 염려에 빠지기도 하고, 마침 그때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불안감에 더 깊이 빠져 들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붙들리지 못한 죄의 모습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완벽이 증거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증표일까요?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정죄는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추궁하실 죄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강입니다.

 

 

22,23절을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사도들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성령을 주시는 이유가 그들의 책무가 죄사함과 연관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과 사랑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과 사랑의 증인으로 세상에 보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실패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실패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으시고 세상에 보내십니다. 자신들의 모든 실패를 덮으시고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확인하고 그 증인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은 내세에 대해 소망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증거하는 증인이라는 현실로 다가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둔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마음을 두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현실에만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현실에만 마음을 두기 때문에 죄를 용서하신 사랑보다는 실생활에 필요한 것을 풍족히 제공해주는 사랑을 원하게 됩니다. 이것이 죄를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용서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보면 많은 것이 부족하고 부끄러움도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스스로 부족함을 채워서 좀 더 좋은 신앙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안됩니다.

 

 

현대 교회가 교인들에게 열심을 내어서 좋은 신앙인이 될 것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결국 죄를 그대로 두는 것이 됩니다. 좋은 신앙인이 되고자 함으로써 부활의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용서를 보기보다는 그럴듯한 자기 신앙만을 보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세계에는 불안과 염려가 없습니다. 평강만이 있을 뿐입니다. 신자는 이 평강을 위해서 평강의 증인으로 보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보지 말고 나 같은 자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주의 평강이 여러분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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