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1.11.27 13:58

(9강) 돌아오지 아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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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3:1-10http://onlycross.net/videos/jer/jer-03011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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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그들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3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4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이시오니

5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 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하시니라

6 요시야 왕 때에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배역한 이스라엘이 행한 바를 보았느냐 그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

7 그가 이 모든 일들을 행한 후에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게로 돌아오리라 하였으나 아직도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는 그것을 보았느니라

8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9 그가 돌과 나무와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행음하여 이 땅을 더럽혔거늘

10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설교>

이스라엘이 이방신을 받아들인 것은 그들의 눈에 이방인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보기에 좋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들은 이스라엘이 비할 바 없는 강한 힘을 소유한 강대국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이방인이 강한 국가를 이루고 있는 것이 이스라엘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의 강한 힘이 그들이 섬기는 신의 역사로 나온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을 받아들이고 섬김으로써 이스라엘 자신들도 힘을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세상을 바라보면서 부러워하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부럽다는 것은 내게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소유한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지만 부러움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신 것을 세상의 것보다 더 가치 없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증거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삶을 부러워했습니까? 복음으로 인해 온갖 고난을 받는 사도에 비해 풍족하고 부요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처럼 사도로 불리면서 바울보다 더 인기가 있고 사도로 인정을 받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들을 부러워했을까요? 사도에게 세상의 인기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이 따른다는 것,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대형교회의 목사 되는 것이 부러움도 아니고 목표도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오직 복음이 전부였고 복음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자 됨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복음을 말하지만 실상 우리 마음에는 복음에 대한 분명한 가치관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이스라엘처럼 세상의 부를 누리며 힘을 가진 이방인들이 부러움의 대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방인을 향한 부러움은 자신들에게도 현실로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어져 이방신을 받아들인 것이고 이것을 5절에서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신앙은 어떤 경우에도 나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나 수단으로 이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뜻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위한 것이기 우리의 뜻을 이뤄주기 위한 힘이나 능력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현대 교회가 잊었기 때문에 참된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나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을 떠난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것을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2절)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욕심을 이루기 위해 신을 찾는 것이 곧 음란과 행악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땅을 더럽히는 것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오로지 욕심으로 살아온 세월일 뿐입니다. 이러한 인생을 뒤돌아본다면 오통 행음한 흔적으로 가득할 뿐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수치를 알지 못합니다. 이것을 3절에서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창녀는 자신의 음란에 대해 이미 감각이 둔해져 있습니다. 때문에 몸을 사고파는 음란을 당연하게 여김으로 수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것처럼 이스라엘은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 신을 찾는 것이 하나님을 망령되이 섬기는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땅을 더럽히는 것이라는 자각이 없습니다.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 살고 신을 찾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자신들의 악에 대해 둔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수치 또한 당연히 알지 못합니다.

 

 

 

자기의 수치를 알지 못하면 감히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도 알지 못하게 됩니다. 1절에 보면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고 말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행음한 자로써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는 수치스런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수치를 알지 못한 채 여전히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신을 부를 뿐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자신의 수치를 알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자신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거룩한 땅을 더럽힌 자들이고 하나님께 멸망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당연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수치스러운 자신에 대한 바른 판단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수치를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신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원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내어 쫓았습니다. 유다는 이 같은 하나님의 일을 모두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없이 행음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욕심을 이루기 위한 자기 길로만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을 보고 있습니다. 또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을 통해서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 신을 찾는 것이 곧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내 마음에 드는 신을 찾아가는 행음에 해당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 같은 행음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나의 수치를 알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욕심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욕망의 끈을 놓으려고 하지 않을 정도로 끝없이 나를 향한 욕망에 집착한 채 살아갑니다. 이러한 인간의 현실을 덤덤하게 생각하고 당연하게 여긴다면 그는 유다처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고 들으면서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소경이요 귀머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이스라엘이나 유다와 동일하게 멸망을 길을 가는 것입니다. 멸망의 길을 가면서도 자신이 가는 길을 알지 못하니 답답할 뿐입니다.

 

 

 

욕심을 버릴 수 없는 나 자신에게서 봐야 하는 것은 수치입니다. 나라는 사람은 하나님께 나올 수 없고 그 이름도 부를 자격이 없는 부끄러운 존재라는 사실에 깊은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들고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모든 수치를 덮어주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라고 하나님을 찾고자 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세상을 살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욕망대로 모든 것이 이뤄지는 세상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의 모든 수치를 덮어주는 용서의 세계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내 욕심을 위해 살아온 흔적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뒤덮인 인생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놀라운 기적이 임한 것입니다. 이 기적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내 욕심의 끝과 용서의 은혜의 끝이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길을 가야 할지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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