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2.09.23 12:59

(88강) 복이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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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84:1-12http://onlycross.net/videos/psa/psa-84011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7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8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9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설교>

 

우리가 함께 읽은 84편을 보면 12절 마지막이 ‘복이 있나이다’라는 말로 끝나고 있고 앞에서도 복이 있다는 말이 몇 번 등장합니다. 이것을 보면 84편은 복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 주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복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을 받는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복인가?’의 문제입니다.

 

 

현대 교회는 복에 대한 개념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대다수가 복을 세상과 연결하여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 남들보다 더 편하고 좋은 환경을 누리는 것을 복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도 그런 의미의 복을 제시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복에 대한 우리의 상식과도 같은 고정된 생각을 내려놓고 성경이 말하는 복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복을 왜 복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지, 세상이 복이라고 하는 것들이 왜 복이 아닌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여야 상투적인 복의 세계에서 벗어나 참된 복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고 말하고, 2절에서도 자신의 영혼이 쇠약해 질 정도로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는 마음을 얘기하고, 3절에서는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4절에서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 주의 집을 향한 시편 저자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시편 저자는 주의 집에 거할 수 없는 형편이었는지 모릅니다.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포로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다른 나라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시편 저자가 그런 형편에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주의 장막, 주의 제단, 주의 집은 모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나아와 제사를 드리던 성전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은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찬송했으며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별 것 아닌 것 같은 성전이 유대인들에게는 삶의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전에 갈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주의 집에 거하는 것이 복으로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물론 주의 집에 거하는 것이 곧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복이 있다고 한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시편 저자가 주의 집에 거하는 것을 구원 문제로 연결하여 그 때문에 복이 있다고 한 것이라면 그는 자기 문제에 집중한 사람이기 때문에 오늘날 자기 문제를 위해 하나님을 찾는 사람과 다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복도 세상의 복과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주의 집에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있습니다. 그 긍휼과 자비에 대한 감사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주의 집입니다. 따라서 저자는 주의 집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영광 돌리는 사람으로 거할 수 있는 것을 복으로 여긴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모든 관심이 자신을 향해 있습니다. 때문에 자신에게 좋은 일이 있지 않으면 항상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때문에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한다면 그것은 내가 원하는 나를 내려놓았을 때 가능하다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에게 초점을 두었을 때 힘들고 어려운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찬송이 주의 궁정, 주의 집에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주의 집에 거하지 않는 자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서 항상 자신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을 위해 살고 세상에서의 자신의 일로 인해 울고 웃으며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대해서도 마음이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주의 집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사모하십니까? 세상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우리는 돈이 없으면 세상에서의 삶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돈을 원합니다. 하지만 돈이 없다고 해서 멸망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없어서 최악의 결과로 굶어 죽을 수는 있지만 그 영혼이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이 망하는 것은 그 심령에 예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것이 신자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그 영혼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믿는 신자라면 당연히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내 인생에 돈은 없어도 되는데 예수님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복 있는 자로 믿는 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주께 힘을 얻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주께 힘을 얻는 경험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혹시 주께 힘을 얻어야 할 만큼 절망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분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온 인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해 절망하게 됩니다. 자신의 의로는 생명에 도달할 수 없음을 절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의는 보이지 않고 죄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실상인데, 그런 실상을 보면서도 절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께 힘을 얻는다는 것은 이처럼 의의 문제로 접근을 해야 합니다. 만약 이 말을 ‘어떤 일로 인해서 낙심을 하고 있었는데 기도를 하니까 힘이 생기더라’는 식으로 접근하게 되면 심리적인 느낌을 주의 힘으로 착각할 위험이 많습니다. 주의 힘은 심리적인 느낌이나 기분, 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령 지갑에 돈이 없을 때는 힘이 빠지는데 두둑이 돈이 들어 있으면 힘이 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께 힘을 얻는다는 것은 자신의 처지가 어떻든 주를 바라보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주가 누구신가를 알기에 주가 없는 인생은 실패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주께 소망을 두고 주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형편이 좋지 않으면 사람들이 ‘예수 믿는데 왜 그렇게 사냐?’라고 조롱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조롱 속에서도 변함없이 주가 나의 소망임을 믿으며 주를 바라보는 것이 주께 힘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집이 아니라 주가 누구신가를 알았고 주가 없는 인생의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 즉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사모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합니다.

 

 

주의 궁정에서는 한 날을 살아도 죄가 용서된 거룩한 자로 살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곳은 아무리 화려한 곳이라고 해도 용서의 은혜 밖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주의 궁정에 거하는 것이 분명 복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은 주와 연결하여 이해되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복 있는 자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복을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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