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3.08.04 10:01

(85강) 시드기야의 속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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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34:1-11http://onlycross.net/videos/jer/jer-340111.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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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통치하에 있는 땅의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과 그 모든 성읍을 칠 때에 말씀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가서 유다의 시드기야 왕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이 성을 불사를 것이라

3 네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손에 넘겨져서 네 눈은 바벨론 왕의 눈을 볼 것이며 그의 입은 네 입을 마주 대하여 말할 것이요 너는 바벨론으로 가리라

4 그러나 유다의 시드기야 왕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네게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5 평안히 죽을 것이며 사람이 너보다 먼저 있은 네 조상들 곧 선왕들에게 분향하던 것 같이 네게 분향하며 너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슬프다 주여 하리니 이는 내가 말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

6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 모든 말씀을 예루살렘에서 유다의 시드기야 왕에게 아뢰니라

7 그 때에 바벨론의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남은 모든 성읍들을 쳤으니 곧 라기스와 아세가라 유다의 견고한 성읍 중에 이것들만 남았음이더라

8 시드기야 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한 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고 자유를 선포한 후에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9 그 계약은 사람마다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하고 그의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

10 이 계약에 가담한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롭게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하여 놓았더니

11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


 

<설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에는 인간이 지켜 행해야 할 것도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만 인간이 행할 수 있는 하나님 말씀은 단 하나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이 말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이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실패했음을 증거합니다. 그것이 선악과를 먹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나는 아담과 하와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나는 예수 없이도 내 스스로의 실천과 의로 구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인간이고 자기에게 손해가 아닌 득이 되는 길로만 가고자 하는 것이 인간인데, 그런 속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만 사셨던 예수님만이 지키시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고 의지할 대상은 그 어떤 인간도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그런데 2절에 보면 말씀의 내용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벨론에게 넘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이 성을 불사를 것이고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4절에 보면 바벨론에 끌려간 시드기야가 칼에 죽지 않고 평안히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시드기야에게 그나마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말은 포로로 끌려간 시드기야가 바벨론 군사의 칼에 죽는 것이 아니라 늙어 죽을 때까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시드기야는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고통의 삶에 빠질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시드기야가 어떻게 하는가 하면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하고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백성들과 계약을 맺습니다. 위급한 상황에 처한 시드기야가 왜 이런 계약을 맺을까요? 시드기야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 15:12절을 보면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라는 규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규례를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 되었던 자기 신분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종으로 지내었던 신분을 잊지 않음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오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은혜를 잊지 않은 증거는 종을 억압하지 않고 때가 되면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드러났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지금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규례를 실천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바벨론에 의해 성이 무너질 위기의 때에 그 같은 일을 행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드기야가 백성과 맺은 계약을 생각해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종을 자유롭게 하라는 하나님의 규례를 보면 그냥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후히 줘서 보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시드기야는 종을 자유롭게 하라고는 하지만 후히 줘서 보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면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규례를 실천하는 것처럼 보이고자 할 뿐 진심으로 실천하려는 의도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규례를 실천하는 것처럼 보이고자 했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면 하나님이 행여 자신들을 도우시고 지키심으로 위기 상황에서 건져주실 것을 기대했기 때문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규례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규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 되는 것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규례의 실천을 명목삼아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 시드기야의 속셈입니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인간은 자신에게 불리하고 손해되는 길로 가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11절에 보면 뜻이 변해서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다고 합니다.

 

 

당시 노비는 재산이었는데 재산을 그냥 놓아버리기가 매우 아까웠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인간은 뭘 해도 자신에게 집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늘 욕망에 끌려가고 있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시드기야가 유다를 구원하기 위해 한 일은 하나님 앞에서 업적을 세우는 것입니다. 아마 시드기야는 유다 백성들이 규례를 따라 종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야 말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행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결국 자기 것을 다시 챙깁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기에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다시 부각될 뿐입니다.

 

 

만약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해서 복을 받겠다는 의도가 있다면 그는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에 매인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은혜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자기 한계를 느끼지 못한 채 얄팍한 실천을 수단으로 해서 원하는 복을 받겠다는 사탄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자리하게 되면 말씀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발동되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처지의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회개로 나아가며 모든 죄를 대신 지신 주를 바라보게 됩니다. 주를 보게 되면 죄의 종이었던 나를 자유케 하신 은혜의 세계를 알게 되고 무엇으로도 자신을 의롭게 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자신이 무엇을 행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에 시드기야와 같은 속셈으로 말씀을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자기 구원에만 집중합니다. 그로 인해 우리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고난에는 마음이 멀어집니다. 이것이 유다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이방 나라의 포로가 되는 고통으로 밀어 넣으시는 것입니다. 고통의 자리에서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말씀을 실천한다고 해도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면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 인간이 자기 실천을 명목으로 의롭게 되고 업적을 쌓고 그로 인해 복을 얻겠다는 것이 얼마나 얄팍한 수단일까요? 자기를 아는 것이야 말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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