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7.23 17:28

(87강) 에덴 동산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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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6:32-38http://onlycross.net/videos/eze/eze-36323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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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2.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

33.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너희를 모든 죄악에서 정결하게 하는 날에 성읍들에 사람이 거주하게 하며 황폐한 것이 건축되게 할 것인즉

34.전에는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폐하게 보이던 그 황폐한 땅이 장차 경작이 될지라

35.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폐하더니 이제는 에덴 동산 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주민이 있다 하리니

36.너희 사방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폐한 자리에 심은 줄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37.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38.제사 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설교>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구원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스라엘을 여러 민족 가운데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으로 들어가신다고 하셨고(24절), 그들을 모든 더러운 데에서 구원하고 곡식이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닥치지 않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29절).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고통 받는 이스라엘을 고통에서 건지시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셔서 평안의 삶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취지의 구원으로 이해하지 말 것을 본문 앞의 내용을 다루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을 받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기적을 목격하고 체험한 특별한 백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못하여 믿음에 실패하여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무너지고, 남쪽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무너져 대부분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사태를 겪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우상숭배에서 정결하게 하고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어 여호와의 율례를 지켜 행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한데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 그 어떤 힘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의 구원은 바사 왕 고레스에 의해서 이루어졌을 뿐입니다.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은 온전히 하나님에 의해 성취된 일로 부각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하나님의 일이 이스라엘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더럽힌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한 것임이 36장 내용의 흐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바벨론에 포로 되게 하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취지가 무엇인가를 알아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된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계획에 붙들린 사람입니다. 본래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존재일 뿐인데 하나님의 계획에 붙들려서 우리가 더럽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도구로 사용될 계획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향한 이 같은 계획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그 계획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신자는 세상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그런데 다양함 속에서 한 가지 통일성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계획에 붙들려 있는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고 은혜 아래 있는 것으로 기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계획 아래 있는 것을 참된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자기의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즉 하나님의 뜻이 자신에게 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신을 부르는 것이 인간이 본성인데, 이 같은 본성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계획이 내게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참된 선임을 깨닫고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는 자기 백성이 자기의 뜻을 위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두고 보실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죄를 물어 고통의 삶으로 밀어 넣으시고 다시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붙들려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 신자의 삶의 의미이며 참된 현실인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많이 듣게 되는 것이 ‘이렇게 했더니 이렇게 되었다’는 공식에 의한 해석입니다. 이러한 해석의 조건은 먼저 ‘이렇게 했더니’라는 인간의 행위가 수반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간의 행동에 대한 보답으로 ‘이렇게 되었다’는 결과, 즉 보상의 내용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대로 인간이 행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공식의 해석으로도 가능합니다. 이스라엘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가 그 예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36장에서 말하는 구원과 회복의 내용은 그 같은 공식을 대입하여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했더니’라는 인간의 공로, 행위가 없이 ‘이렇게 되었다’는 하나님의 행하심만 있는 것이 이스라엘의 구원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구원 이야기에서 우리가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고, 그 계획이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적용되어 어떤 이스라엘로 성취되어 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오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참된 현실입니다.

 

 

32절에 보면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너희 행위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고 한탄하라는 것은 ‘너희는 모두가 죄인이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죄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한탄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의 죄의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모습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죄 아래 존재하면서도 죄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무지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행위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고 한탄하는 것은 자기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과 한탄이라고 할 수 있고, 여기에는 무지를 무지로 알아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무지한 자신의 모습에 눈을 뜨지 못한 채, 신앙생활로 간주하는 행위를 근거삼아 스스로를 신앙인으로 인정하는 것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에 죄가 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말에 ‘그럼 기도하는 것도 죄고 성경 보는 것도 죄란 말입니까?’라고 반박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반박 자체가 우리에게 죄가 되지 않은 행동은 없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행동에 죄가 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는 무슨 행동을 해도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이 기준이 아니라 나 자신이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위해 행동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무의식적으로도 우리의 행동은 나를 위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입니다.

 

 

‘기도 하는 것이 죄가 되는가?’라는 반박도 ‘기도는 선한 행동이다’는 기준을 갖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결국 그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하기에 ‘기도하는 나는 선하다’는 결론을 품고 자기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기처럼 기도하지 않는 것은 곧 신앙이 없는 것이라는 시각으로 타인을 보게 되는 이 모든 것이 죄의 세력에 붙들려 있음으로 나타나는 인간성인 것입니다.

 

 

죄에 대해 무지했던 자신에 대해 눈을 뜨게 되면 비로소 자신에게서 죄가 왕 노릇하고 있었던 현실을 알게 됩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0-21)는 바울의 고백이 이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이 죄를 죄로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우리를 끄집어내어 하나님의 은혜로 끌어갑니다. 다시 말해서 죄에 무지했을 때는 자신의 무능력을 알지 못하고 행함이 있으면 되는 줄로 알았고 그것을 은혜 받는 방편으로 생각했지만 죄를 죄로 알게 되면 자신의 무능력의 상태를 알게 됨으로 하나님의 은혜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만이 증거 되는 방향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3,34절에 보면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너희를 모든 죄악에서 정결하게 하는 날에 성읍들에 사람이 거주하게 하며 황폐한 것이 건축되게 할 것인즉 전에는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폐하게 보이던 그 황폐한 땅이 장차 경작이 될지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셔서 하실 하나님의 일이며 계획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놓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으로 머물게 될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정결하게 하시고 황폐한 것이 건축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일로 인해 사람들에게서 “이 땅이 황폐하더니 이제는 에덴동산 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주민이 있다”(35절)는 말을 듣게 됩니다. 에덴동산 같이 되었다는 말을 듣게 하시는 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에덴동산을 유토피아적 환상의 시각으로 이해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완벽한 환경의 이상적인 세상을 에덴동산으로 상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고국 땅으로 돌아가 무너진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곡식을 심고 사람들이 거주하게 된다 해도 완벽한 환경을 이루는 이상적 사회로 건립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에덴동산 같이 되었다는 말을 듣게 하시겠다는 것은 적어도 완벽한 환경의 이상적인 사회가 되게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에덴동산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스라엘을 에덴동산 같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이라면 우리 또한 그 같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붙들려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에덴동산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에덴동산 같이 되게 하신다는 것은 현재의 이스라엘이 에덴동산 같지 않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따라서 무엇이 에덴동산 같지 않은지 부터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욜 2:3절을 보면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동산 같았으나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으니 그것을 피한 자가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그들의 예전의 땅이 의미하는 것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무너지기 전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무너지기 전에는 살기 좋은 환경의 땅이었다는 의미로 에덴동산 같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에덴동산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에덴동산을 만드셨다면 사람이 설령 죄를 범했다 해도 에덴동산에 계속 거주할 수 있도록 조치하셨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위해 사람을 두신 것이기 때문에 죄를 범한 사람을 에덴에서 추방하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가 있고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는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않을 때만 사람으로 인정되고, 그 사람에게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선악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는 말씀대로 흙이라는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즉 사람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닌 흙은 에덴에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할 자격이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흙이 된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유입니다.

 

 

그러면 예전의 땅이 에덴동산 같았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에덴동산 같다는 것은 뭔가 되어야 하는 요구가 없는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사람다운 것입니다. 예전의 땅이 에덴동산 같았다는 것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되어라’는 요구가 없는 세상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시온에 성전이 있습니다. 성전에서는 희생 제물의 피로 인해서 죄로 인해 더러워진 인간이 정결함을 받게 됩니다. 즉 흙을 사람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건만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스스로 되고자 하는 것이 없이 하나님이 긍휼의 사건만 바라보며 그 사건이 자신들을 어떤 사람이 되게 하는가에 초점을 두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기쁨과 감사가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에덴동산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으로도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자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흙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었고 그것이 에덴동산 같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는 이유이며 그 땅은 황폐하게 된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그리고 황폐하게 된 곳을 다시 에덴동산같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하는 것은 에덴동산 같다는 것은 인간에게 그 어떤 요구 조건도 없는 세계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러한 세계로 데리고 가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며 회복의 약속입니다.

 

 

이스라엘이 알아야 하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존재로 되기 위해 힘썼던 모든 노력이 결국은 실패였다는 것입니다. 노력이 부족해서 실패가 아니라 되기 위해 노력한 것 자체가 실패란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인간의 노력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에덴동산 같이 되는 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성전에서의 제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로 인해서 흙이 사람이 되고 에덴동산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이 이루시기에 사람의 노력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에덴동산 같게 하시는 하나님이 일이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38절에 보면 “제사 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에덴동산 같게 하신다는 말씀에 빗대어 보면 황폐한 성읍은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이 있으되 사람이 없는 상태,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흙이 된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신다는 것은 흙인 사람을 사람 되게 하신 것을 뜻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우리를 정결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에덴동산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이 되신 온전한 제사가 흙인 우리를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영생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의 노력이 요구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든 자신의 노력으로 스스로 원하는 모습으로 되고자 한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나를 어떤 사람이 되게 하셨는가를 생각하며 그것이 기쁨과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다 이루신 일 위에서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공로가 나의 공로로 여김 받는 세계, 그것이 여러분의 에덴동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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