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7.30 17:56

(88강) 구하여야 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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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6:37-38http://onlycross.net/videos/eze/eze-36373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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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7.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38.제사 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설교>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자신 있어 하는 믿음의 실천은 성경 읽기와 함께 기도일 것입니다. 특별한 수고와 희생 없이 약간의 시간만 투자하는 것으로도 믿음 생활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기도는 가장 자신 있어 하고, 또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행하는 믿음생활일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 교제 등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신자가 기도하지 않는 것은 거의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고 교제도 없는 죽은 신앙으로 취급되는 분위기입니다. 때문에 교회도 기도를 강조하고 다양한 제목을 붙여 기도 행사를 만들어 내며 교인들을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분위기이다 보니 ‘한국교회가 부흥한 것은 기도 때문이다’는 말도 쉽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도실용주의’에 빠진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만 실용주의에 빠졌겠습니까? 성경읽기, 헌금, 예배 등 모든 것이 실용주의와 연결되어 행해지고 있는 것이 작금의 기독교의 실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신앙의 목적이 ‘자기를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열심히 기도하는 기독교인이 있는 반면에 반대로 기도에 신앙의 비중을 두지 않거나 무관심한 교인들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고, 신앙생활 역시 기도와 상관없이 자기 힘으로 가능하다는 생각이 배경에 자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열성에만 의지하는 형식적 기도에 반발하면서 소위 복음을 아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앞설 때 특별히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복음을 아는 자로 사는 것이 곧 기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아예 기도할 이유가 없어서는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편리와 자기중심이라는 이기적 사고로 하나님이든 신앙이든 복음이든 왜곡하여 받아들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 자신이 필요로 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여 응답 받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이러한 이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기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분명 하나님은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뜻과 계획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성경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일까요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

 

 

기도의 의미와 이유가 인간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으로 기도해야 할 당위성은 충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하신다면 기도해야 할 이유가 모호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를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복음을 안다고 하는 신자들이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도에 대한 또 다른 방향의 왜곡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겔 36장은 바벨론에 포로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겠다는 이스라엘의 회복, 즉 바벨론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행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더럽힌 하나님 이름의 거룩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은 그 계획대로 행하시고 이루실 것입니다.

 

 

그런데 37절을 보면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하나님께 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중심적인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입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의도와는 전혀 다른 왜곡된 이해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는 말씀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말할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구원을 계획하셨지만 그 계획을 이루는 조건으로 기도를 요구하셨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세우신 뜻과 계획도 인간이 기도하지 않으면 실행되지 않는 다는 의미가 돼 버립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나중에 바사왕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서 바벨론에서 해방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된 것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구하였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스라엘이 기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모든 뜻과 계획도 무산되는 것입니까?

 

 

겔 37:14절에 보면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실 일을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이루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구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보시고 말씀하신 것을 이루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루심에 이스라엘의 기도 여부는 전혀 무관합니다. 바로 이점 때문에 ‘그러면 처음부터 하나님이 이루시면 될 일을 왜 구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냐?’라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 원리, 본질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기도를 자신이 목적하는 것,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기도의 의미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목적하는 것을 얻기 위해 도움을 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수단으로 하여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종교성에 의해 왜곡된 기도이고 모든 종교 세계에 공통적으로 자리하고 통용되는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종교는 없습니다. 신을 섬기는 모든 종교는 신을 대상으로 기도를 하고 초월적 능력이 있다고 믿는 신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뜻과 목적을 이루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산에 가셨다가 내려오셨을 때 산 밑에서는 남아있던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신 후에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도함으로 능력이 나온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기 때문에 귀신을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국교회에서 기도는 능력의 의미로 굳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치유사역으로 유명한 손기철 장로라는 사람이 쓴 ‘왕의 기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중심 내용은 ‘잃어버린 하늘 권능을 되찾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을 누리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만이 드릴 수 있는 왕의 기도를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왕이신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문제를 꾸짖고 명령하여 쫓아낼 수 있는 기도가 왕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왕의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의 이름대로 선포하고 행동하여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기적을 체험하자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내용에 열광합니다. 기도함으로써 특별한 능력이 부여되는 특별한 존재가 되는 환상과 착각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도가 자기 번성과 확장이라는 선악과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한국교회에는 기도와 연관된 수많은 비성경적인 용어들이 난무합니다. ‘기도는 기적을 만듭니다’‘기도로 승부하십시오’‘기도는 세계를 움직입니다’등등의 표어로 교인들을 선동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하는 비신앙적인 사람으로 치부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는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하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라는 말에는 신자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만 그 내면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하고 내가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겠다’는 의도가 숨겨 있습니다. 은연중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 주어진 형편과 조건으로는 어려운 일을 ‘기도했더니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인간은 무능력한 존재라는 인식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로 구분하고,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도움을 구하는 것은 자신의 필요를 따라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기도를 종교적 시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적 시각에서 말씀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이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는 말씀에 대해서도 자기중심으로 해석할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면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하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하여야 할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기도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떤 존재로 만들고자 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고 말씀하는 것은 도움을 구하면 말씀대로 이루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란 족속은 시작부터 바벨론 포로가 된 현재까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나중의 모든 일에서까지 하나님에 의해 되어졌음을 알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알아야 할지니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38절에 보면 “제사 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절기를 지킬 때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따라서 절기가 되면 제사에 제물로 사용될 소와 양이 예루살렘을 가득 채웠을 것입니다. 그것을 제사 드릴 양 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무너지면서 제사도 중단되었습니다. 그렇게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제사 드릴 양 떼가 사람의 떼로 바뀌었습니다.

 

 

출 34:22-23절을 보면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세말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너희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라”고 말합니다.

 

 

절기 때 모든 남자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보일 것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추수한 모든 열매가 인간이 일해서 얻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심으로 얻게 된 것임을 잊지 말라는 취지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잘 알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가치와 본질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함과 열심의 결과에서 찾습니다. 예를 들어 ‘기도했다’는 실천에서 자기 가치와 본질을 찾으려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의 존재 근거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자기의 실천, 행함에서 찾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보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란 존재의 가치와 본질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잊지 말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이 말씀한 황폐한 성읍을 채울 사람의 떼는 단순히 사람이 많게 해서 예루살렘을 번성하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자신의 가치와 본질을 찾는 사람으로 채우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전적 무능이라는 자신의 본질에 눈을 떴음을 뜻합니다.

 

 

결국 ‘구하여야 할지라’는 말씀은 지금까지 한순간도 하나님의 도움 없이 존재할 수 없었던 인간의 본질에 눈을 뜬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이들로 채워진 것이 에덴동산이고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셨지만 그들에게 구원의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조건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다움은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나올 때는 자신들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아는 것이 여호와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신자는 비록 자신의 열심과 노력으로 무엇을 한다 해도 그것을 자기의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이 일할 수 있는 모든 조건과 형편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은혜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자기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만 있을 뿐이고 모든 것을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로 여긴다면 당연히 어떤 일도 자기 영광과 자랑의 도구로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자는 기도를 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으로 존재합니다. 이렇게 나의 기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신 은혜로 감사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 된 신자다움인 것을 알기에 그러한 신자 됨에 자신의 뜻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기도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항상 하나님께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자신에 대해 욕심을 낼 수 있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함으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고백 또한 자기 것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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