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8.06 17:25

(89강) 살아난 마른 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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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7:11-14http://onlycross.net/videos/eze/eze-371114.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1.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12.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14.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설교>

성경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만약 우리가 듣고자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성경이라면 성경은 지금처럼 많은 분량이 필요치 않습니다. 이것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만한 구절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마 거의 모든 분량이 우리의 마음에서 삭제될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성경에 대한 기독교인의 내면의 모습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말씀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듣고자 하는 말만 들으려고 하기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은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하면서 신앙 세계를 납득 할 수 없게 되고 혼란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고, 주인공으로 살고 싶어 하는 욕망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함께 하신다고 하면서도 정작 현실은 하나님과 무관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한 신앙생활도 괜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위해 노력하고 수고함에도 불구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내면으로부터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교회를 찾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어쩌면 신앙 형식만 남은 종교심일 수도 있습니다. 신앙 형식이라도 붙들고 있으면 혹시라도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사건들을 접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방식에 의구심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묻고 싶은 것은 없습니까? 여러분이 처한 현실에 대해서도 묻고 싶은 것이 없습니까? 없다면 그것은 신앙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맹목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의구심이 드는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불의한 면이 있는 것일까요? 하지만 선하신 하나님에게서 불의한 일이 나올 수 없습니다. 다만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에 의해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은 하나님의 방식에 대해 불의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구심이 있는 것은 우리의 불의로 인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은, 모든 일은 여러분의 생각과 상식과 기준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뜻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께 수없이 강조한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계속 말씀드리는 것은 모든 일에서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놓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의구심이 드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충돌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고 믿는데 왜 충돌될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힘으로 신앙의 열매라고 할 수 있는 좋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생각하는 반면,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믿음의 열매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모든 기대와 소망을 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지 않는 반면, 하나님은 그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만이 행하신다’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만들어 내신 것으로 감사하는 백성 됨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종교적 행위로 인한 결과물이지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신앙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신자가 하나님이 기뻐하실 뭔가를 만들어 내야 함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만들어 내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을 때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앙조차도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의 행위와 열심을 보시고 복 주실만한 자에게 복을 주셔서 현실적인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주시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또한 윤리와 도덕적으로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에게서 복 받을 조건이 되는 좋은 행위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세상 또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기준에서 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자기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주 아래 있어서 선이 나올 수 없다고 보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충돌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4-16)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에 여러분은 얼마나 동의하십니까? 분명한 것은 신앙과 현실은 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생각하는 신앙세계가 인간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허상이 실상, 즉 현실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생각대로 되지 않은 현실로 인해 소망보다는 실망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막연하게 죽어서 가는 천국을 소망한다는 말만 있는 기독교인이라는 껍데기만 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마른 뼈입니다.

 

 

본문은 에스겔에서 하나님이 마른 뼈를 서로 연결시키고 힘줄이 생기게 하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게 하고 생기를 넣어 다시 살아나게 하는 내용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내용은 실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영으로 에스겔을 데리고 가서 골짜기에 두심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골짜기는 마른 뼈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납니다. 마른 뼈로 가득한 골짜기는 한마디로 희망, 소망이 없습니다. 생명이 없는 죽음만 있는 현실이 마른 뼈 골짜기입니다. 그러한 골짜기가 생명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마른 뼈로 말씀합니다. 만약 여러분을 향해서 마른 뼈라고 하시면 쉽게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른 뼈는 죽어서 뼈만 남은 상태를 말하는데, 자신이 그런 상태의 존재라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 본문을 부활로 연결하여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가 마치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말하는 것처럼 이해할 수 있고,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12절)라는 구절에서 무덤을 열고 나오게 한다는 말씀 또한 부활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본문의 상황과 문맥을 무시하고 몇몇 구절에만 치우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부활을 말하면 안된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참된 의미를 생각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성경 해석의 오류라고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마른 뼈로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소망이 없어진 자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망이 없는 상태를 가리켜서 마른 뼈라고 하신 것입니다. 비록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뼈들이 서로 연결되고 힘줄과 살과 가죽이 새겨 사람의 형태가 되었다 해도 중요한 것은 생기가 없으면 그는 마른 뼈와 다를 바 없이 죽은 자와 같습니다.

 

 

그렇게 보면 생기가 있다는 것은 자신들에게 소망이 있음을 알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소망이 없어진 존재로 여기던 이스라엘로 하여금 소망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고 소망이 있는 이스라엘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왜 자신들을 뼈들이 말랐고 소망이 없어졌다고 생각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처한 현실의 상황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만 생각한다면 그 상황 자체가 암담하다 할 수 있고 그러한 현실이 곧 무덤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스라엘의 생각처럼 바벨론에서의 고통의 상황이 곧 소망이 없어진 것이고 무덤과 같은 것이라면 이스라엘을 무덤을 열고 나오게 하신다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현실과 환경을 바꾸어 주시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비록 바벨론의 포로에서 해방 되어 고국 땅으로 돌아갔다 해도 형편이 일순간에 나아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본문은 환경이나 형편의 개선과는 무관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만이 아니라 성경에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즉 하나님은 신앙의 보답으로 현재의 삶의 환경을 인간이 원하는 것으로 바꾸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을 초기에는 하나님이 곧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렘 28:3-4절을 보면 하나냐란 선지자가 “내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이 곳에서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성전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다시 이 곳으로 되돌려 오리라 내가 또 유다의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냐의 말대로 하자면 포로 생활은 이 년 안에 끝납니다. 따라서 길어도 이 년만 참고 견디면 하나님이 고국 땅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신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냐가 생각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고통 속에 버려두지 않으시는 분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구상해 낸 하나님이란 신적 존재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을 잊지 않고 찬송하는 존재로 남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곧 모든 상황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만으로 소망이 있는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이 주신 생기로 살아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미래를 ‘멸절’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현 상황이 그러한 미래를 예측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도 그들에게는 이미 무의미한 말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함께 하신다면 지금의 이 상황이 주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문 앞에서 이스라엘의 해방에 대한 말씀을 들었지만 바벨론에서 해방되고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불행이 끝나고 행복만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고국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 재건에 온 힘을 쏟았지만 여전히 강대국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현실을 맞이합니다. 성전도 재건했지만 또 다시 파괴되고 재건하는 일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행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삶도 때로는 이스라엘과 같을 때가 많습니다. 겪는 현실은 다르다 해도 심정에서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면 이 모든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으로 힘을 얻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어떤 생각에 사로잡히게 될까요? 절망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도 믿을 수 없게 되고 이스라엘처럼 소망이 없어지고 암담한 미래에 대한 절망만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마른 뼈라고 하십니다.

 

 

마른 뼈는 삶의 환경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삶의 환경이 타인이 부러워 할 정도로 풍요롭고 좋다 해도 소망이 없다면 그는 생명이 없는 마른 뼈에 불과합니다. 물론 부활과 재림과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다고 하겠지만 만약 그 소망이 참된 것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이 있어야 하고 그 소망으로 인해 모든 현실에서 하늘의 영광된 것을 바라봄으로 인내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생기가 있는 산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 적도 없고 눈으로 본적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 생각과 기대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백지의 상태로 오직 성경에서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른 뼈인 자기 백성을 살리십니다. 생명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우상입니다. 비록 현재 상황은 고통이라 해도 분명한 것은 그 모든 일들이 우리를 생명으로 끌어가고 생명의 세계를 보이기 위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은 보이는 세상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다스리시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향해 있습니다. 이 소망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두시는 은총입니다.

 

 

하나님이 영으로 에스겔을 데리고 골짜기로 가셔서 거기서 뼈가 가득한 현실을 보게 하신 것처럼 신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른 뼈로 가득한 현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은석교회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소망이라는 말은 하면서도 언제나 세상의 현실에 기대를 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소망이 있습니까? 진심으로 소망이 있는 자로 산다면 그 소망은 모든 현실에서 하나님이 위로가 되시고 힘이 되심을 경험하게 합니다. 이 소망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소망은 나의 욕망과 연결된 욕망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는 참된 소망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 지고 우리 안에 은총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이 소망이 우리를 보이는 것을 의지하는 욕망으로부터 끌어내어 진리로 자유하는 생명의 삶으로 끌어갑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마른 뼈임을 인정하십니까? 쉽게 인정이 되지 않으신다면 이스라엘과 같은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소망이 없다 하지 않고 생명 되신 하나님을 의미하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할 수가 없지만 설사 잘한다 해도 그 결과가 현실이 우리가 기대한 형통으로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형통으로 이해하는 것이 현실의 풍요와 함께 편안한 삶인 경우가 많지만, 예수님이 없는 형통의 끝은 영원한 사망입니다. 그것도 형통일까요?

 

 

하나님의 일하심의 목적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함께 하십니다. 환경이 아니라 생명에 초점을 둔다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그가 생명의 능력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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