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6.11 18:05

(81강) 한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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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4:20-24http://onlycross.net/videos/eze/eze-34202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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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곧 내가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서 심판하리라

21.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를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

22.그러므로 내가 내 양 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 거리가 되지 아니하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23.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24.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설교>

성경에 있는 내용들은 우리가 접하는 현실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증거 하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믿음을 주셔서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믿게 하십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 세계를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구축되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확정된 약속이 하나님에 의해 성취됨으로 존재하게 된 세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된 신자만이 성경이 증거 하는 세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보이는 것이 증거가 아니라 성경이 증거 하는 말씀의 세계를 믿게 하는 믿음이 증거가 됩니다.

 

 

이처럼 말씀의 세계가 보이는 것이 증거가 되는 세계가 아니라면 신자는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신앙의 증거로 삼지 않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로 문제가 해결되었다거나 병이 나았다거나, 기도하고 전도하는 실천적인 그 어떤 것도 증거로 삼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기독교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보이는 것을 증거로 삼으며 보여주는 신앙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실천이 있어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실천이 없으면 믿음이 없거나 연약한 자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믿음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면 믿음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믿고 붙들기 위해 보이는 것을 포기하는 길로 가게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 주어진 이유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붙들고자 하는 것들을 보면 온통 보이는 것들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하거나 사랑하고자 하는 것이 보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고 보이는 것으로 향해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을 붙들고자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보이는 것을 붙들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 교회는 믿음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결여된 채 오로지 인간의 생각과 상식과 경험과 종교심에 의한 믿음 아닌 믿음이 강조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꿈꾸고 소망하는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과 능력으로 활용되고 있는 종교 세계의 믿음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의 시각으로는 성경의 세계를 결코 볼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당장 본문의 내용이 그러합니다.

 

 

23,24절을 보면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양과 양 사이, 즉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서 심판하기 위해 한 목자를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목자가 하나님의 종 ‘다윗’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은 이미 죽고 없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죽고 없는 다윗이 목자가 되고 하나님의 양 떼의 왕이 될 수 있을까요? 물론 우리는 죽은 다윗이 다시 부활하여 목자가 되고 왕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라 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로 세우시겠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목자임을 안다 할지라도 현재 우리에게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실재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기독교인은 예수님의 살아계심과 존재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며 신자를 도우신다는 것도 믿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자체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는 믿음의 세계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보이는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려놓게 한다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을 함께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말씀하신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은 충돌할 수밖에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한 목자로 세워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게 하시고 왕이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말씀 그대로 지금 우리는 다윗이 목자가 되어 먹이고 왕이 되어 다스림 받는 현재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보이는 세계가 아닌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 세계를 믿게 하고 우리의 참된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목자가 되어 우리를 먹이고 왕이 되어 다스리는 세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실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 자손으로 오셨음을 알고 믿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본문에 대해서는 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윗이 예수님을 지칭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죽은 다윗이 목자로 등장하고 예수님이 그 목자로 오셔서 자기 양 떼를 먹이시고 왕이 되어 다스리는 그 세계를 알고 있고 살아가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인들의 믿음의 세계는 큰 위기 상황에 처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 하는 믿음의 세계는 볼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믿음의 모든 것을 보이는 것으로 확인하고 증거로 삼고 즐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보이는 것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때문에 자연히 보이는 것을 좇게 되고 그것을 믿음의 증거로 삼으려고만 합니다. 그로 인해 보이는 것이 있으면 좋은 신앙, 없으면 좋지 않은 신앙으로 치부됩니다.

 

 

그렇게 보면 20절에서 말하는 살진 양은 보이는 것으로 풍성한 양, 파리한 양은 보이는 것이 없는 양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양과 양 사이를 심판하시기 위해 목자를 보내신 것이라면 목자가 옴으로 인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중에 무엇이 심판의 대상인지가 드러난다는 뜻이 됩니다. 여기에서 굳이 다윗을 목자로 세우시겠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왕들 중에 왜 다윗을 목자로 세우시겠다고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다윗에게는 치명적인 흠이 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을 하고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로 보내 죽게 한 것입니다. 왜 이러한 다윗을 목자로 등장시키는 것일까요?

 

 

물론 죽은 다윗이 목자로 다시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다윗보다 더 뛰어난 인물을 내세워서 목자로 세우시고 그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보이는 것을 증거로 삼으려고만 하는 우리의 서경과 같은 무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다윗이 도덕과 윤리적으로 흠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었고, 그 때문에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도덕과 윤리가 중심이 된 세상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도 성령을 보내시는 것도 도덕과 윤리적 인간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 되고, 믿음의 삶도 도덕과 윤리라는 실천으로 부각될 것입니다. 그렇게 도덕과 윤리가 믿음으로 인정이 되면 결국 살진 양은 도덕과 윤리라는 실천이 풍성한 양으로 부각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을 목자로 세우신다는 것은 다윗의 인품이나 공로, 업적과는 무관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 역시 다윗의 인간적인 면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죄를 경험했던 왕입니다. 하나님은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인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다윗 자신이 여호와께 죄를 범한 존재임을 알게 합니다. 죄를 깨닫게 된 다윗의 심정은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3-5)는 고백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다윗은 단순히 ‘나는 죄를 범한 죄인입니다. 용서해주십시오’라는 통속적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 자체가 죄에 묶여 있음을 자각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죄 중에서 자신을 잉태했고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다는 것이 그에 대한 처절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 문제에 대해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0-12)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다윗은 죄를 극복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알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 51:13절에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모든 범죄자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주의 도는 모든 죄를 씻으시고 깨끗하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주의 의를 말하는 것이고, 따라서 주께 돌아온다는 것은 자신의 공로와 의가 아니라 주의 의를 의지하는 자로 주 앞에 나오게 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다윗이 증거 한 주의 도를 성취하시는 분으로 예수님이 오셨고 그것이 곧 십자가의 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의 세계는 인간의 공로, 즉 보이는 것으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다윗의 고백대로 인간의 실존은 죄에 묶여서 죄를 행하는 것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서 심판하신다고 하면서 다윗을 목자로 세우신다고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공로를 중심으로 하는 세상을 심판하시고 상한 심령이 되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 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만 먹으며 포악으로 다스리는 것은 다윗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알게 된 상한 심령과 긍휼의 원칙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만약 목자들이 상한 심령과 긍휼의 원칙을 알았다면 백성, 즉 양 떼들을 긍휼과 자비로 먹였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선한 목자이고 예수님이 선한 목자로 오셔서 자기 몸을 버리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긍휼과 자비로 먹이신 것입니다.

 

 

겔 34:13-15절을 보면 “내가 그것들을 만민 가운데에서 끌어내며 여러 백성 가운데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양을 찾아 좋은 꼴을 먹이고 좋은 우리에 누워 있게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 안에 있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친히 목자가 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 모든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있게 된 것으로 좋은 꼴을 먹고 좋은 우리에 누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 된 우리의 보이지 않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좋은 꼴 먹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보이는 것으로 배부름을 얻고 싶어 합니다. 때문에 보이는 것으로는 확인되지 않는 긍휼과 용서의 세계보다는 보이는 것으로 확인되는 병 고침이나 물질의 복에 치우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살진 자와 강한 자를 없애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보이는 것이라고 해서 실재이고 증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고후 4:18절에 보면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세상의 마지막과 함께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병 고침을 받았다고 해서 죽지 않는 것 아닙니다. 병 고침을 받아도 부자가 되었다 해도 동일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 안에서만 깨끗함을 얻고 거룩한 자로 여김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관계는 보이는 것으로 차별되고 나눠질 수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가 상한 심령이 되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로 나올 뿐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목자가 되어 인도 받는 세계, 다윗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그 나라는 다윗의 정신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처럼 죄가 곧 자신의 실존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긍휼에만 모든 희망을 두는 것이 다윗의 정신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정신에 다스림을 받는 것이 참된 이스라엘이며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 양으로 인정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 아래 있게 되고 그 긍휼과 용서의 정신을 따라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의 세계에는 살진 양과 파리한 양의 구분이 없습니다. 무엇을 실천하든 상관없이 모두가 주의 의가 아니면 죄에 붙들려 사망으로 끌려갈 불의한 존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알았던 상한 심령과 긍휼이 의미를 모른다면 보이는 것을 좇고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살진 양과 파리한 양으로 나눠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이는 것을 좇는 세상의 현실이고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긍휼의 원칙으로 살진 양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모든 말씀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죄인 창녀와 같은 파리한 양에 비해 살진 양이라고 할 수 있는 바리새인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화있을진저’라고 책망하심으로 무엇이 심판의 대상인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긍휼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용서, 긍휼을 구체화 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로 기뻐하고 긍휼로 즐거워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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