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6.18 17:53

(82강) 화평의 언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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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4:25-31http://onlycross.net/videos/eze/eze-342531.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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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5.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26.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27.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

28.그들이 다시는 이방의 노략 거리가 되지 아니하며 땅의 짐승들에게 잡아먹히지도 아니하고 평안히 거주하리니 놀랠 사람이 없으리라

29.내가 그들을 위하여 파종할 좋은 땅을 일으키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지며 다시는 여러 나라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지라

30.그들이 내가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며 그들과 함께 있는 줄을 알고 그들 곧 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 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

31.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설교>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기 전에 세상에 최후로 남기신 말씀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떠나시고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로 하여금 증인의 삶을 살게 하시겠다는 것인데 그 일을 위해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증인의 삶은 성령을 받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이고 다른 의미로 말하면 인간의 실천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인간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인간을 돕기 위해 성령이 오셨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성령이 인간과 협력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룬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비성경적인 주장이 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의를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이고 그것을 ‘전적무능력’이라고 하는데 그와 같은 ‘전적무능력’을 부인하는 주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증인은 어떤 사건이나 사실에 대해 증거 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건, 사실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의 사건, 사실을 말하는 것이고 따라서 증인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러한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 성령이 오셨다면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하고 경험하게 하기 위해 오신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 경험하는 것은 죄와 죽음에 갇힌 인간의 실상을 자각하는 것으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여러분께 수없이 강조한 내용입니다. 죄와 죽음에 갇힌 인간의 실상을 자각하고 그것이 곧 인간에게 주어진 영원한 저주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죄와 죽음에서의 해방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의 사건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여러분에게 발생한 사건이 되고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증언하는 그가 바로 그리스도의 증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증인은 세상이 생각하는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이 인정해주는 모본이 되는 삶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증인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증인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었다면 죄와 죽음에 갇혀 영원히 저주 아래 있어야 할 자신에게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을 증언함으로써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되는 그 이유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양 떼 위에 한 목자를 세워 그들을 먹이게 하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목자가 다윗입니다. 다윗은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행한 죄를 덮어 버리고 그의 업적만으로 평가한다면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든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또한 하나님이 이루신 일의 결과임을 생각한다면 다윗의 업적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내세울 것이 없는 불의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윗을 목자로 세워서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과연 다윗이 목자가 되었을 때 양 떼에게 먹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다윗에게는 평생토록 잊을 수 없고 벗어버릴 수도 없는 범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범죄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인 됨에 깊은 자각을 했고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경험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경험한 다윗은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다윗의 고백이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25,26절)는 말씀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문제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실천이라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실천으로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단절되었습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간이 원상태로 돌려놓으려면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 죄 없는 존재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것 외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죄에서 벗어나 죄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아무리 수준 있는 실천을 행한다 해도 죄 아래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실천을 보시고 복을 주시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언급하는 복의 내용을 ‘하나님은 소낙비처럼 복을 내려 주시는 분입니다. 이 복을 받기 위해서는 신앙의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라는 식으로 해석할 수 없음을 먼저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화평의 언약이라는 말을 합니다. 화평은 인간과 인간관계에서의 화평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관계에서의 화평을 말합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인간과 인간관계에서의 화평은 없습니다. 다만 화평한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화평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여러 가지의 이유로 인해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습니다.

 

 

화평의 언약은 인간과 인간을 서로 화평의 관계로 만들어서 행복하게 살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를 화평의 관계로 회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화평에 대해 하나님이 언약하셨다는 것은. 화평은 실천에 대한 인간의 열심과 정성 등과 무관하게 오직 하나님의 언약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된 소낙비를 내린다는 말씀에서도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복을 받을만한 실천이 있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포상이 아니라 화평의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이루신 결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여야 합니다. 이러한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실적으로 증언으로 증언자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에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화해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맺으신 화평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롬 5:9-11절을 보면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말합니다.

 

 

화목은 곧 화평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에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에 있게 된 것이 참으로 복되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요? 우리의 본래의 위치, 즉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에 있는 인간의 본래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원수였다는 것을 안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원수인 우리와 화평의 관계를 이루시고 그 관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언하게 하고자 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하나님과 원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인간이 세상에 관심 두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실상을 보면 ‘하나님의 원수가 나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같은 고백이 우리의 진심이 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한 하나님과의 화평이 소낙비와 같은 복의 세계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된 소낙비는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화평의 언약 안에서 보게 되는 것이고 알게 되는 것이며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과 원수 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위해 굳이 죄를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 자체가 하나님과 원수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본성대로 살아가는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원수에 지나지 않은 본래의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멸망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러한 취지에서 벗어나 자기 멋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 사람들이 거짓선지자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은 덮어버린 채 하나님이 자신들을 도우셔서 수 년 내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고통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기 위한 말이었을 뿐 하나님의 취지는 아니었습니다.

 

 

구원은 화평의 언약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화평이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화평이 없는 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라는 사실에 눈을 뜨도록 일하시고 율법을 주신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무지한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대단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인정받는 일에 몰두합니다. 윤리와 도덕으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고, 좋은 인품이라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고, 목사는 교회 부흥으로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탄의 유혹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임을 느끼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원수라는 본래의 자리를 잊게 하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둔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가 생각하는 구원관에는 신앙의 실천 여부에 따라 천국에서의 상이 다르다는 인식이 팽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에서 나올 수 없는 사고방식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때 가능한 사고방식입니다. 결국 외적 조건을 기준으로 한 우월감이라는 것도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일 뿐이라는 사실에 무지함으로 나타나는 결과일 뿐입니다.

 

 

마 5:9절에 보면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신자가 화평하게 함으로써 복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써 화평하게 하는 복이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의 양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화평하게 하는 자로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데 화평하게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에 다툼이 있을 때 화해시키는 것이 화평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교회가 다툼이 없는 평온의 상태에 있다면 화평하게 하는 일은 중지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툼이 없으니 화평하게 하는 일도 요구되지 않는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것은 다툼이 있을 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신자라는 존재 자체가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에게서는 언제나 화평하게 하는 일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타인보다 우월해 보이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본인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안다면 화목 제물로 오신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게 됩니다. 이것이 화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내가 더 낫다’는 우월을 향해 달려갑니다. 화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기쁨과 만족에만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과 원수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원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도,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집착한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신자를 복되다 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고 하나님의 화평의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가 기쁨이 되고 만족이 되는 복의 세계를 추구하는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합니까? 세상으로부터 훌륭하다고 존경받는 인격과 덕목을 갖춘 사람이 되길 원합니까? 그렇다면 왜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타인보다 뛰어난 우월한 인간으로 존재하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원수된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신자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도 상관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을 벗어나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화평의 언약의 관계로 맺어진 신자 됨을 윤리와 도덕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즉 윤리와 도덕, 인격과 덕목 등을 내세워서 사람들이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신자로 존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경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화평의 언약을 맺으셨고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롬 3:25절에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세우셔서 화평의 언약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화평은 인간과 상관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27-29절에서 말한 복의 모습은 실제로 그러한 현실을 누리게 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될 축복이 어떤 것인가를 당시 그들이 처했던 형편을 빗대어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그처럼 놀랍고 풍성한 복으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평의 언약에 있는 신자에게는 그리스도가 만족이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만족이 되는 관계에서는 인간의 실천이 자랑이 되고 만족이 되고 우월의 조건이 되는 모든 것이 사라진 화평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 54:10절의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는 구절을 보면 화평의 언약은 무엇으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인간이 드러낼 수 있는 최고의 의로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화평의 언약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심으로 외로운 자로 여김 받으며 영원한 생명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며 그리스도의 증인된 신자가 증언해야 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러한 복음으로 먹이실 목자로 오셨습니다. 이 복음이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양식이 되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할 생수입니다. 복음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집착하며 원수로 살아가는 나를 보게 하는 것이고 화평의 언약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소망으로 믿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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