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7.02 17:02

(84강) 처음보다 나은 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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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6:11-15http://onlycross.net/videos/eze/eze-361115.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으로 많게 하되 생육이 중다하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접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12.내가 사람으로 너희 위에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그들은 너를 얻고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로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

13.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는 사람을 삼키는 자요 네 나라 백성을 제한 자라 하거니와

14.네가 다시는 사람을 삼키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나라 백성을 제하지 아니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15.내가 또 너로 열국의 수욕을 듣지 않게 하며 만민의 비방을 다시 받지 않게 하며 네 나라 백성을 다시 넘어뜨리지 않게 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설교>

성경에는 ‘이것이 정말 사실일까?’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초자연적인 기적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신자가 성경에 등장하는 그 모든 기적을 체험 한다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고 알게 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결론은 ‘알 수 없다’입니다.

 

 

‘기적의 사건을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는가?’라고 반발할 수도 있지만, 비록 제가 기적을 체험하지 않았다 해도 실제로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 모습을 드러내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주는 이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기적의 체험이 있습니다. 그 기적만으로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함께 하시고, 도우신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지 못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만으로는 이방인들과 같은 생존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기적이라 해도 현실의 생존에 도움이 되어야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습성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이방 나라에 의한 멸망으로 대접하였습니다. 이스라엘로서는 하나님께 그런 대접을 받아도 원망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먼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원수가 이스라엘의 산들이 자신들의 기업이 된 것으로 좋아하고, 이방 나라의 말거리가 되게 하고 비방 거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겔 36:2,3).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렇게 대접하신 것은 처음보다 더 나은 것으로 대접하시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깊이를 알아가도록 하기 위함인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즉 이방 나라와 이스라엘이 동일하게 하나님께 심판의 예언을 듣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백성 되게 하기 위한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35장은 세일 산, 즉 에돔 족속을 향한 심판의 예언입니다. 그리고 36장은 1절의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는 말씀대로 이스라엘 산, 즉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예언에는 이방 나라나 에돔을 향한 예언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이스라엘을 황폐하게 하고 고통을 겪게 했다 할지라도 다시 회복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하게 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사랑하기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말 1: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이 말씀대로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셨고 에서는 미워하셨기 때문에 에서의 후손인 에돔은 하나님의 미움으로 영원한 저주의 길로 가야했고 야곱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축복의 길로 가야했습니다. 이것이 에서와 야곱에게 주어진 운명이며 이 운명에 대해서 항의할 권한이 있는 자는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회복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 1:4절을 보면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에돔은 자신들이 무너뜨림을 당해도 다시 쌓겠다고 합니다. 끝까지 자신들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에돔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미움 아래 있는 세상의 특징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야곱, 즉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자신들의 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이방나라처럼 힘을 가지고 싶어 했고 그래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다만 다른 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끝까지 간섭하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말씀을 의지하는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는 에돔과 이스라엘의 역할이 무엇이며 어떻게 다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에돔은 하나님의 미움 아래 있는 족속으로 무엇이 하나님의 미움의 대상인가를 보여주는 역할이고, 이스라엘은 에돔과 동일하게 미움을 받아야 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저주가 아닌 축복의 길로 가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역할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고 해서 그들의 모든 죄에 대해 아예 눈을 감으시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이뤄주시는 방식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죄에 대해 심판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은 황폐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백성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이 사랑하신 이스라엘도 이방 나라와 다를 바 없는 저주의 자식임이 증거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심판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에돔에는 없는 회복을 말씀하심으로 미워하기로 한 자와 사랑하기로 한 자가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회복은 단순히 원래의 형편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벨론의 포로 생활이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셔서 예전의 이스라엘로 다시 복구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복의 의미라면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11절을 보면 “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시겠다는 것이 이스라엘 회복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시겠다는 것은 패망하기 전의 이스라엘 보다 더 나은 형편이 되게 하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겨우 예전보다 더 나은 형편이 되게 하시는 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면 예루살렘에 황폐화 되고 이방 나라의 포로가 된 고통의 의미가 상실되고 말 것입니다. 결국 ‘우상을 섬긴 죄 값을 치렀더니 하나님이 예전보다 더 잘 살게 하시더라’고 말하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스스로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무너진 예루살렘과 성전을 다시 재건한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교훈삼아 우상을 버리고 온전한 신앙의 길로 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극적으로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하고 성전을 재건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들은 또 다시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만 드러내었습니다. 이유는 삶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학 2:3절을 보면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였지만 모든 것이 부족한 처지에서 예전의 솔로몬 때의 성전 그대로 건축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귀환하여 성전을 건축하며 기초를 놓았을 때 백성들은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불렀지만 솔로몬 때의 첫 성전을 본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기초의 초라함을 보고 대성통곡을 하였던 것입니다(스 3:10-13).

 

 

이처럼 성전의 초라함을 보고 실망한 이들에게 하나님은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7-9)고 말씀합니다.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고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시고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클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백성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요? 성전만 건축하면 지금의 모든 어려움이 사라지고 금은보화로 가득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서의 현실과 연결하여 이해함으로 나타나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현실은 그들의 기대를 벗어났습니다. 성전을 다시 건축하였지만 그들이 이해하는 하나님 말씀처럼 모든 나라의 보배로 채워지는 성전의 영광은 이뤄지지 않고 여전히 어려운 현실만 계속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시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현실은 늘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 소경이 되게 합니다.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잘 안다고 자부한다 해도 원하지 않은 현실에 부딪히게 되면 현실을 기준하여 은혜와 사랑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씀에 대해서도 심적으로 동의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는 말씀에 대해서도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반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의 영광이 모든 나라들의 보배로 채워질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한 성전의 나중 영광은 그들이 생각하는 보배가 아니었습니다. 성전의 이전 영광은 외적인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인데 외적으로 얼마나 화려했을지는 짐작되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쳐도 이스라엘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성전의 이전 영광을 회복한다 해도 이스라엘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신앙의 길로 가지 않는다면 결국 심판이 반복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전 영광보다 큰 나중 영광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 11절에서 말씀한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겠다는 말씀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전의 이전 영광은 성전이 크고 작고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전이라는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성전으로 가야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친히 제물이 되셔서 자신의 몸으로 온전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몸과 피를 주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영광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이 이전 영광에 비할 바 없는 큰 나중 영광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시겠다는 것은 율법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독생자 아들로 하여금 대신 담당하게 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혜택을 누리도록 대우하시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산들을 향한 하나님의 예언이고 회복의 약속입니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 자신이 원하는 대우를 받고 싶어 합니다. 열심히 교회를 출석하고 봉사하고 헌금한 것에 대한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대가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처럼 달라지지 않은 현실로 인해 실망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12-14절을 보면 “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그들은 너를 얻고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들이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는 사람을 삼키는 자요 네 나라 백성을 제거한 자라 하거니와 네가 다시는 사람을 삼키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나라 백성을 제거하지 아니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문자의 의미대로 이해하면 다시는 자식을 잃어버리는 전쟁으로 인한 죽음이나 포로 됨이 없게 하시고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하겠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잃어버리고 전쟁으로 인해 자식을 잃고 포로로 끌려간 모든 것이 그들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음을 생각한다면 위의 말씀은 다시는 죄로 인한 심판이 없을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참된 회복이고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인 것입니다.

 

 

죄로 인한 심판이 없다는 것은 죄가 없는 자로 여기시겠다는 것이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심으로 주어진 결과임을 아실 것입니다. 12절의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도저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컬음 받을 자격이 없는 이스라엘을 백성으로 대우하시는 것이 그것을 말씀하는 것이고 이전영광보다 큰 참된 성전의 나중 영광인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시는가를 알고, 대우 받을 수 없는 자를 대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그 사랑을 나타내고 보여주는 그릇으로 존재하는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처음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하는 자신들의 신앙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제사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서 그들의 신앙이 신앙이 아님을 보여주시고 처음 성전이 아닌 나중 성전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영광이 더 크다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대우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증거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우하심으로 세상의 모든 보배로도 얻을 수 없는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생으로 인해 감사하지 못하고 항상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 것을 그리워합니다. 이런 우리를 여전히 그리스도의 은혜에 붙들어 놓으시고 ‘내 백성’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와 사랑을 우리 속에 남기시고 굳건히 세우시기 위해 하나님이 쉬지 않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대우하시는지를 생각하시고 과연 하나님께 그런 대우를 받을만한 자인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세상 그 어떤 영광보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 된 자리에서 예수님을 알아가는 그 영광이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어떻게 대우하시는가를 아는 앎이 우리를 모든 일에서 감사하는 신자로 만들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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