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3.06.09 10:02

(80강) 내 밭을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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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32:1-15http://onlycross.net/videos/jer/jer-320115.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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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유다의 시드기야 왕 열째 해 곧 느부갓네살 열여덟째 해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2 그 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

3 이는 그가 예언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차지할 것이며 유다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진 바 되리니 입이 입을 대하여 말하고 눈이 서로 볼 것이며 그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어 가리니 시드기야는 내가 돌볼 때까지 거기에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더니 유다 왕 시드기야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같이 예언하였느냐 하고 그를 가두었음이었더라

6 예레미야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7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8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나에게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9 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10 증서를 써서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11 법과 규례대로 봉인하고 봉인하지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가지고

12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매매 증서에 인 친 증인 앞과 시위대 뜰에 앉아 있는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매매 증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치며

13 그들의 앞에서 바룩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증서 곧 봉인하고 봉인하지 않은 매매 증서를 가지고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라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설교>

 

  선지자 예레미야가 유다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히게 된 상황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임합니다. 당시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포위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만약 우리에게 현실로 주어진다면 우린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유다는 하나님을 믿는 민족이고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참된 선지자입니다. 유다는 비록 죄로 인하여 징벌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예레미야는 왜 감옥에 갇히는 곤경에 처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레미야가 처한 상황은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납득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유다나 예레미야와 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뭐하시는가?’라는 조롱을 뱉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고초를 겪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세상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도 겉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삶을 배경으로 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인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옥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에게 사촌 하나멜이 와서 ‘내 밭을 사라’고 요구하면 그 밭을 사라고 지시합니다. 평소 같으면 이 말씀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밭을 팔고 사는 일은 일상생활에 포함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갇혀 있고 유다는 바벨론에게 패망하기 직전의 상황에서 밭을 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벨론에게 유다가 무너진다면 유다는 바벨론의 식민지가 되고, 유다의 땅 역시 바벨론의 다스림을 받을 것이 당연한데 밭을 산들 자신의 소유가 된다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레미야에게 밭을 사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5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밭을 사라고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 여호와여 주께서 내게 은으로 밭을 사며 증인을 세우라 하셨으나 이 성은 갈대아인의 손에 넘기신 바 되었나이다”(25절)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구심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가 처한 현실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처한 현실과 접목시키려고 하게 되면 예레미야처럼 의구심만 남게 될 것입니다. 가령 행 2장에 보면 초대교회의 모임에 대해 말씀하는데 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다고 합니다. 과연 이 말씀을 우리의 현실에서 납득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이 말씀대로 하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됩니까?’라는 의구심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는 또 하나의 현실은 삶입니다. 이 두 현실은 서로 충돌되는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신앙의 현실을 통해서 삶의 현실을 바르게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삶의 현실만 보게 되면 단지 수고하며 일하고 먹고 살다가 죽었다는 것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삶에 하나님을 끌어 들여서 좀 더 좋고 나은 삶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삶의 끝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허무일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현실에서 삶의 현실을 보게 되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는 것이 자신의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삶에 허무는 없습니다.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죽음조차도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음을 믿는다면 죽음도 끝이 아니라 영원으로 이어지는 통로임을 알게 되는 것이고 결국 죽음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에게 밭을 사라고 하시고 유다 또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된다는 말씀은 유다가 바벨론에게 무너지고 포로로 끌려가서 고초를 겪게 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단지 주변 상황과 조건에 의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에 의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가 망한다고 해서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 밭을 사라는 말씀에 담겨 있는 현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에게는 삶의 현실만 잘 풀리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현실이 잘 풀리든 잘 풀리지 않든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신앙의 현실에서 삶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신자는 모든 삶에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현대 교회는 신앙이 아닌 다른 길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현실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삶의 현실에만 매인 채 하나님을 찾는 것이야 말로 신앙과 무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삶의 현실에 접목하여 사람들에게 헛된 희망을 안겨주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 역시 신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종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뜻을 세우시고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삶의 현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선한 뜻을 두고 일하십니다. 따라서 비록 지금은 암담하게 여겨지는 상황이라고 해도 그것이 삶의 현실의 전부가 아니며 반드시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선한 뜻에 의해서 되어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지금보다 더 좋은 상황이 주어지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나 형편이 좋아지고 나빠지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믿음의 세계로 우리가 인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한 뜻입니다.

 

 

삶의 현실만 보게 되면 좋은 일이 있을 때 웃고 나쁜 일이 있으면 울게 됩니다. 하지만 신앙의 현실에서 삶을 보게 되면 좋은 일이 있든 나쁜 일이 있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나를 인도하심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선하신 뜻으로 인해 나 같은 자가 생명에 있게 됨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신앙의 현실을 좀 더 깊이 보게 되는 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삶의 현실에 머물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믿는 신앙의 현실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가 여러분의 삶으로 인해서 증거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신자로 부름 받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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