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5.21 15:47

(78강) 자기만 먹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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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4:1-6http://onlycross.net/videos/eze/eze-34010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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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3.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4.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5.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6.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설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예언할 것을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양은 외면하고 자기만 먹는 목자들이었기에 화가 있을 것이며, 그러한 목자들이 양떼를 먹이는 마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이름만 목자들이었을 뿐이지 목자로서 당연히 행해야 할 양을 먹이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4절)고 말씀한 것처럼 양떼를 괴롭게 하는 악한 목자들이었을 뿐입니다.

 

 

양떼를 먹이고 보살피는 목자가 없음으로 인해 양떼의 처지는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으며, 흩어졌으되 찾는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목자들을 대적하여 하나님의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신다고 하십니다(10절).

 

 

이처럼 하나님이 양을 찾아 흩어진 모든 곳에서 건져내시고 본토로 데리고 가서 좋은 꼴을 먹이며 하나님이 친히 목자가 되어 양들을 좋은 우리에 누워있게 하시겠다고 합니다(11-15절). 이처럼 하나님이 목자가 되셔서 흩어진 양들을 찾으시고 본토로 데리고 가서 좋은 것으로 먹이시겠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목자들은 이스라엘을 신앙으로 바르게 가르치고 인도해야 할 위치에 있는 왕, 제사장, 선지자와 같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털을 입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만 먹는 목자들이 양에게 행한 횡포에 대해서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4절)라고 말합니다.

 

 

양을 포악으로 다스리고 자기만 먹었다는 것은 목자로 자처하는 이들이 자기의 배를 불리고 자기 몫을 챙기는 일에만 열심이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목자로 세우신 이유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철저히 외면한 것입니다. 이들은 목자로 자기만 먹는 것으로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에 비춰본다면 그들이 목자 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자기만 먹는 악한 목자들을 미리 조치하지 않으셨을까요? 악한 목자를 미리 제거하시고 양들을 잘 먹이는 선한 목자로 세우셨다면 이스라엘이 멸망이라는 비참한 처지는 면하지 않았을까요? 사실성경 전체가 우리를 그러한 의문으로 끌어갑니다. ‘하나님은 왜 땅에 존재했던 사탄을 미리 제거하지 않으시고 세상을 창조하셨을까요?’라는 의문으로 시작해서 성경 전체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그 의문의 중심에는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의 속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아십니까?

 

 

자기만 먹는다는 것은 자신을 목자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배를 불리는 일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음을 뜻합니다. 이처럼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좇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에 성경도,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도 자기 이익을 따라 접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을 제거하고 인간을 창조하시는 것이 인간에게 더 이익이 되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문을 갖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만 따로 골라 취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있을 때만 언급되는 은혜와 사랑일 뿐 힘든 일에서는 원망과 불평으로 반응합니다.

 

 

이처럼 자기 이익만을 따르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존귀함을 알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기만 먹고 양을 포악으로 다스리는 목자가 있음으로 하나님이 목자가 되셔서 양을 찾으시고 먹이시고 인도하시며 눕게 하시는 은혜와 사랑의 존귀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에 은혜와 사랑에 대한 말은 홍수처럼 넘칩니다. 하지만 정작 홍수에 마실 물이 귀한 것처럼 은혜와 사랑의 존귀함을 알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와 사랑을 행복과 성공을 위한 수단과 방편으로 계산하는데서 오는 오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귀함을 알 수 있습니다. 본인은 은혜와 사랑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자기 이익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저주와 다름없는 현실로 밀어 넣으시고 그 현실 속에서 참된 목자로 자기 양을 찾으시고 인도하시는 은혜와 사랑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목자에 대해 들으면서 ‘나는 저런 목자가 안돼야지’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자기만 먹는 목자에 대해 말씀하면서 ‘화 있을진저’라고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목자처럼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참된 목자는 하나님뿐임을 알고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존귀함을 증거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악한 목자에 대해서만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포악으로 다스림을 받았던 양에 대해서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양들이 자기만 먹는 악한 목자에 의해 포악으로 다스림을 받았다면 그 고통이 컸을 것입니다.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 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6절)라는 말씀처럼 아예 버림받은 것과 같은 상태에 있던 것이 당시 양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양들은 악한 목자로 인한 고통에서 자신들을 찾고 좋은 것으로 먹여줄 참된 목자를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자에게 다스림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목사가 말하고 가르친 대로 움직였고 목자가 이방의 우상을 세우고 신으로 섬기게 한다 해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만 먹는 악한 목자의 포악을 포악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양들은 양들 나름대로 자기 이익을 생각했기 때문에 인간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이방 신을 거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문제에서 한국교회에 존재하는 여러 문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자기만 먹되 양떼를 먹이지 않았던 것처럼 현대 교회에서 목자로 자처하며 교인들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인도하는 위치에 있다고 하는 목사가 자기만 먹는 일에 치우쳐 있습니다. 양떼, 즉 교인들을 말씀으로 먹이고자 하는 것보다 말씀을 수단과 방편으로 삼아 자신의 말에 따라 움직이는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소위 개혁을 말하는 사람들은 참된 목사가 많아지면 교회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처럼 교회를 변화시키고 건강한 교회로 만드는 것이 목사의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참된 목자가 많이 발생하여 교회가 건전해지고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에 있을까요? 저는 그 또한 사단의 사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악한 목자를 허용하신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왜곡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자기만 먹는 악한 목자가 없었다면 이스라엘이 패망하지 않고 편안히 잘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악한 목자가 없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자연히 자기 이익을 따라 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역사에 성실히 양을 돌보는 목자도 등장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유다 왕국의 16대 왕인 요시야입니다. 요시야는 팔세에 왕위에 올라 삼십일 년간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22:2)고 말할 정도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었습니다.

 

 

요시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산당과 아세라 목상, 조각신상 등 우상을 치우면서 예루살렘에 만연했던 우상 신앙을 정화하는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바알 제단을 무너뜨리고 우상을 부수어 가루로 만들고 그 가루를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던 자들의 무덤 위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왕하 23:22-23절을 보면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사사 시대부터 유월절은 거의 형식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요시야가 바로 잡은 것입니다. 이런 요시야에 대해서 성경은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5)고 평가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목자가 요시야만 같았다면 백성들은 행복을 누리며 잘 살았을까요? 바꾸어 말해서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만 그대로 전하고자 하는 목사만 있다면 교인들은 말씀을 바르게 배우며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으로 기뻐하며 신앙의 행복을 누리고 살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요시야가 한 일은 정치를 잘해서 이스라엘을 부요한 나라가 되게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회에 깊이 만연되어 있는 우상을 부수어 바른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영하고 기뻐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왕의 명령대로 행했다 해도 속으로는 불만을 가졌을 것입니다.

 

 

또한 요시야 같은 왕이 선한 목자라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그런 목자로만 세우지 않으셨을까요? 요시야 같은 왕만 등장했다면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지 않고 바른 신앙의 길로 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우리의 오해라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이라는 속성에 묻혀서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시야 왕이 성전을 수리하는 중에 대제사장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고 사반이 요시야 왕 앞에서 읽습니다. 율법책의 말을 들은 요시야 왕은 옷을 찢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죄로 인해 애통해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왕하 22:8-11).

 

 

요시야 왕이 대해 하나님은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왕하 22:19)고 말씀합니다.

 

 

우린 이런 내용을 보면서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으로 인해 죄를 알게 되고 애통해 하며 마음이 겸비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양떼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한다면 목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닫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기만 먹는 목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의 포악 아래 있으면서도 그것을 포악으로 간주하지 않게 됩니다. 결국 목자도 양도 자신을 추구하는 것에서 동일한 것입니다.

 

 

건전한 교회 세우시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였다면, 건전하지 못한 목사들은 제거하시고 건전한 목사로만 가득하게 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교회는 목사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고, 십일조, 봉사도 강요하지 않고, 과도한 퇴직금을 요구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이 하나님의 취지고 이러한 교회를 원하신다면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 되실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한 건전함은 인간의 자발적 실천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가 건전한 교회로 가득하고 넘친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존귀함을 절실히 깨닫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교회됨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은혜와 사랑은 영원한 죽음의 자리인 저주에서 건짐 받음으로 인한 감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건전하다고 생각하는 교회일수록 자신이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됩니다. 건전한 교회에서 건전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생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스스로 인정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자신을 바른 목사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인 것처럼 바른 신자로 생각하는 것 또한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착각이 소위 건전하고 바르다고 생각하는 교회의 큰 문제로 박혀 있다는 현실에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의 악한 목자들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악한 목자들에게 포악으로 다스림을 받으면서도 목자들의 말을 듣고 따르는 양들도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목자의 악함을 보지 못하고 포악한 다스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선한 목자에 대한 간절함이 없는 그것이 현대 기독교인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선한 목자는 예수님 한분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목자라고 말하는 목사에게 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가 제아무리 건전하고 바르게 행한다 해도 여러분의 죄 값을 자신의 피로 대신하시고 저주에서 건지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우리가 누구인가를 말씀으로 증거하여 신자로 하여금 예수님에게만 마음을 두도록 돕는 일에 충실할 뿐입니다.

 

 

설령 목사가 복음만 전한다고 해도 그를 선한 목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먹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말씀을 전할 뿐이지 말씀을 양식으로 먹이시고 먹게 하시는 선한 목자는 예수님 한 분입니다. 그 예수님만을 필요로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이 만족이 됨을 경험하게 되는 그 사람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양이며 예수님에 의해서 이러한 양이 드러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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