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6.04 17:43

(80강) 양과 양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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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4:17-19http://onlycross.net/videos/eze/eze-34171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7.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의 양 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 사이와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심판하노라

18.너희가 좋은 꼴을 먹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

19.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하셨느니라

 

<설교>

누구도 자기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즉 자신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는 말로 분명히 못 박고 있습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사도 바울의 증언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시작하여 현재까지 계속되어 왔고 세상 마지막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즉 죄를 범하는 인간의 상태는 전혀 개선됨이 없이 세상 마지막의 순간까지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어떤 노력으로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따라서 누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와 상관없이 인간은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 죄인으로 판단될 뿐이며 이에 대해서 어떤 사람도 차별이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잣대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는 죄 없는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그 어떤 의의 행위로도 죄 없는 의인으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고 말씀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되어 죄 없는 자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을 믿게 되고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에 우리의 행위는 전혀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롬 3:22절에서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차별이 없습니다. 인간의 조건이나 행위와 상관없이 전적으로 값없이 베풀어진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ㅓ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떤 차별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만약 차별이 있다면 그것은 값없이 베풀어진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대해 차별이 발생한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잣대가 아닌 자기의 잣대를 기준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이 말은 믿음은 인간의 행위를 잣대로 하여 판단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에게 어떤 행함이 있다 해도 인간은 죄를 범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잣대에 의한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위를 잣대로 하여 누군가를 판단한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이 아닌 행함을 잣대로 하여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행함을 바라보는 자 그 누구도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극복할 의의 행위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7절에 보면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의 양 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 사이와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심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양과 양의 사이가 있다면 목자와 양의 사이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목자와 양의 사이는 어땠을까요? 이미 앞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전혀 좋지 않았습니다. 2절에서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목자는 양 떼는 먹이지 않고 자기만 먹었습니다. 또한 포악으로 양 떼를 다스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목자에 대해 대적하시고 하나님의 양을 찾아 좋은 꼴을 먹이고 좋은 우리에 눕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14절).

 

 

세상에 양을 위해 존재하는 목자는 없습니다. 참된 목자, 즉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립니다. 이러한 목자의 길로 가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 앞에서 목자라 자처하는 모든 목자들은 ‘목자 아니오’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 말은 목자가 양들을 향해 증언할 것은 ‘나는 목자가 아니오’로 시작하여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도록 하는 것이 목자라 자처하는 목사의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서로가 자신이 참된 목자인 것처럼 행세하려고 합니다. 스스로를 윤리와 도덕으로 포장하고 인격과 성품으로 무장하여 선한 목자인 것처럼 나타내고 자신을 따르게 하고 자기의 말을 듣게 하려고 합니다. 때로는 복음만을 증거 한다는 것을 명목으로 자신을 따르고 높이는 내편 만들기에 주력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어느 특정인의 모습으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목자라 자처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그래서 결론은 세상에 선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증거 하는 것이 목자로 세움 받은 사람의 역할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목자와 목자 사이에 차별은 없습니다. 모두가 심판을 받아야 할 동일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17절에서 말하는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의 사이도 다르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존재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따라서 양과 양 사이에는 차별이 없어야 하며 숫양과 숫염소 사이도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양과 염소가 서로 다른 존재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점에는 동일하기에 숫양과 숫염소의 사이에도 차별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양으로 자처하는 우리 스스로가 나의 잣대를 가지고 타인을 판단하고 차별하는 습성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양과 양 사이에서 심판하신다면 심판에 해당되는 양이 누구일지는 능히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20절을 보면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곧 내가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서 심판하리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17절의 양과 양은 살진 양과 파리한 양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살진 양의 횡포는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를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21절)는 말씀에서처럼 힘없는 양을 핍박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들에게 이웃 사랑은 살진 양끼리의 사랑으로 이해될 뿐입니다. 그들의 잣대로 바라보는 파리한 양은 하나님의 사랑 밖에 있으며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저주 받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양과 양 사이에서,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심판하신다면 누가 심판에 해당되는지에 대한 답은 이미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화를 위해 하나님을 우상의 수준으로 전락시켜 버리고 나의 필요와 행복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속은 불의와 추악과 탐욕와 악의로 가득합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더러움은 보지 못하고 타인을 비방하고 판단하며 나보다 못한 자로 보이는 사람에 대해서는 우월감을 가집니다. 성경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말씀했고 우리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을 진심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신의 잣대를 가지고 자신을 평가하고 타인도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사형에 해당될 뿐입니다. 따라서 양과 양은 어떤 기준과 조건을 내세운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사형수에 해당될 뿐입니다. 이것이 양과 양 사이이며 숫양과 숫염소 사이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양과 양 사이를 나누고 숫양과 숫염소 사이를 나눕니다. 양도 다 같은 양이 아니라 하고 숫염소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도 합니다.

 

 

그렇게 나누는 기준이 극히 인간적입니다. 자기만 먹는 목자에게 좋은 양은 살진 양이기에 살진 양을 하나님께 복 받을 양 다운 양으로 말하고, 파리한 양은 자기 배를 불리는 도움이 되지 않기에 무시합니다. 양과 양 사이에 거짓 목자가 자리한 채 양을 자기 기준으로 제멋대로 판단해 버립니다. 하지만 양과 양 사이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좋은 양으로 평가 받았던 살진 양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되어 있는 양으로 평가될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양과 양을 구분하고 차별하며 숫양과 숫염소를 구분했던 모든 기준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를 보면 믿음 있는 자와 믿음 없는 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의 중심에는 교회와 목사가 있고, 조금 건전하다 싶으면 윤리와 도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교회 성장과 돈을 쫓는 목사라면 교회 봉사와 전도 등에 대한 열심과 목사에 대한 충성을 기준으로 세워 신앙을 평가할 것입니다.

 

 

만약 양심이 있어 나름대로 건전한 목사라면 교회 성장과 돈을 말하기보다 윤리와 도덕을 말할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이러한 목사들이 많습니다, 윤리와 도덕을 신앙 기준으로 내세우며 선한 삶이 있는 것을 신앙이 좋은 것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양과 양 사이에 계시고 심판하신다면 교회 성장과 돈이 신앙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윤리와 도덕 또한 신앙의 기준으로 인정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윤리와 도덕적인 삶을 좋은 신앙의 기준으로 가르친다면 하나님의 잣대는 무시하고 인간의 잣대와 기준을 고수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기준이 되어야 하고 잣대가 될 수 있는 것은 십자가뿐입니다. 제아무리 윤리와 도덕을 내세운다 해도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십자가의 기준 앞에서는 생명의 능력이 없는 것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백성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허물을 보게 되면서 감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컬음 받을 수 없는 심정으로 나오는 그들입니다. 이들이 지난주에 말씀드린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살진 양입니까? 파리한 양입니까? 현실에서는 살진 양으로 존재하고 싶되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파리한 양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닙니까? 이것이 우리의 욕망입니다. 내게 유리한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따라서 조건과 형편을 넘어서 모든 인간이 살진 양으로 존재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양과 양 사이에 계시고 심판하실 때 여러분을 살진 양에게 핍박 받는 파리한 양으로 여기시고 여러분 편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살진 양의 습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지만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지 않는 사람보다 나은 것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이 잘한 것이고 더 나은 사람으로 인정될 조건이 된다 해도 그것으로 우리가 나은 존재로 구별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이 나의 깨달음과 나의 의지에 의한 결과여야 합니다. 하지만 신자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한 고백이기에 나의 공로도 자랑도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세계는 무엇으로도 ‘내가 더 낫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겔 15:2-4절을 보면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땔감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여 말합니다, 포도나무는 포도나무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열매가 가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열매가 없는 포도나무는 아무런 가치도 쓸모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포도나무라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포도나무이기 때문에 포도나무가 아닌 너희와는 다르다는 구별의식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가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결국 불에 던질 땔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방 나라보다 나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이 천국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무엇을 내세운다 해도 이방나라보다 우월하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허락된 특혜는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심판이 마땅한 자를 돌이키시고 모든 죄와 허물을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방인에 대해서는 내어버려두심으로 일관합니다. 때문에 이방나라는 하나님의 심판도 용서의 은혜도 알지 못한 채 멸망으로 향해 갈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도 용서의 은혜도 체험할 수 있다’라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진심으로 심판과 함께 용서를 체험했다면 하나님의 행하심만 바라고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할 뿐이지 그것을 자기 자랑의 도구로 삼지 않습니다.

 

 

신자는 십자가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의 은혜 모두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를 용서하신 예수님만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 길에는 우월도 차별도 없습니다. 모두가 심판이 마땅한 자로 만나고 동일한 용서의 은혜로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우리를 십자가로 끌어가고 십자가 아래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진정한 양과 양사이입니다.

 

 

18,19절을 보면 “너희가 좋은 꼴을 먹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 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좋은 꼴 먹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는 자는 좋은 꼴 먹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남은 것도 하찮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죽어야 할 인간으로, 심판이 마땅한 존재로 바라보십시오. 지금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은 여러분이 누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으로 양과 양은 살진 양, 파리한 양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되는 파리한 양으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진리를 깨달으며 영생의 길을 바라보는 복된 자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찾으신 양과 양 사이에도 당연히 그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이 찾아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벗어나 살다가 멸망으로 끝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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