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3.04.07 09:43

(72강) 포로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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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29:15-23http://onlycross.net/videos/jer/jer-29152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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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5 너희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바벨론에서 선지자를 일으키셨느니라

16 다윗의 왕좌에 앉은 왕과 이 성에 사는 모든 백성 곧 너희와 함께 포로 되어 가지 아니한 너희 형제에게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1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에게 상하여 먹을 수 없는 몹쓸 무화과 같게 하겠고

18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들을 뒤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쫓아낸 나라들 가운데에서 저주와 경악과 조소와 수모의 대상이 되게 하리라

1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들에게 꾸준히 보냈으나 너희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0 그런즉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보낸 너희 모든 포로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2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들은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한 자라 보라 내가 그들을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너희 눈 앞에서 그들을 죽일 것이라

22 바벨론에 있는 유다의 모든 포로가 그들을 저줏거리로 삼아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너를 바벨론 왕이 불살라 죽인 시드기야와 아합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리니

23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어리석게 행하여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며 내가 그들에게 명령하지 아니한 거짓을 내 이름으로 말함이라 나는 알고 있는 자로서 증인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

 

 

<설교>

 

세상의 그 어떤 일도 하나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유다는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유다가 바벨론이라는 이방나라에 의해서 무너지고 일부는 포로로 끌려가 고통을 당하는 현실은 하나님이 하신 일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고통을 겪는 유다 백성의 입장에 있다면 하나님의 이 같은 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이 당연히 자신들을 도와주실 것으로 여겼습니다. 부귀영화, 형통, 평강,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이 누려야 할 몫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게 진행됩니다. 멸망을 받아야 할 이방 나라가 오히려 형통하고 형통해야 할 유다가 이방 나라에 의해 압제를 받는 이 같은 현실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이러한 현실로 인해 하나님께 불평 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외면하신 것 같은 현실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믿음의 길로 간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누구시고 어떤 뜻을 가지고 일하시는 가를 아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에게 쓴 예레미야의 편지입니다. 편지 내용은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주 매정합니다. 고통을 겪는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위로해주는 말은 전혀 없고 오히려 칠십 년이 차야 돌아온다는 말로 그들을 절망하게 합니다.

 

 

칠십 년이 차야 돌아온다면 당시 포로 생활 하는 장년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이년 내에 돌아오게 한다는 거짓 선지자의 말에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그 말이 더 희망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유다 백성들은 포로 된 사람과 포로 되지 않고 유다에 남겨진 사람으로 그 처지가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각자의 처지에서 누가 하나님이 도우셨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당연히 비록 예루살렘이 황폐화되는 일을 겪기는 했지만 그래도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남아있게 된 사람들이 ‘불행 중 다행’이라는 식으로 하나님이 도우셨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남보다는 조금 나은 형편에 있는 것을 하나님이 도우신 것으로 생각하며 심적 위안을 삼는 것입니다.

 

 

반면에 포로 된 사람들은 그나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고 철저히 외면된 것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결국 유다에 남겨진 사람에 비해 징계를 더 받은 것으로 여겨질 것이고 그만큼 죄가 더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현재 처한 처지만을 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판단하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다른 말을 합니다. 포로된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고 포로 되지 않고 유다에 남게 된 것이 오히려 해가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16-19절을 보면 유다 땅에 남겨 진 사람들이 안전하기는커녕 큰 재난을 겪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즉 유다에 남겨 진 것이 결코 잘된 일이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복의 여부를 현재 처한 형편의 질을 기준으로 따집니다. 현재의 형편이 편하면 복 받은 것이고 힘든 문제가 생기면 불행이 주어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눈에는 편히 사는 사람들이 부러운 것이고 복을 누리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편히 사는 것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놓치는 것이 있고, 힘든 일이 있음으로 해서 배우고 알게 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20절에 보면 “그런즉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보낸 너희 모든 포로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고 말합니다. 유다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 망했습니다. 즉 포로가 되었든 되지 않았든 상관없이 모든 유다 백성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동일한 죄 아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포로된 입장에서 보면 포로 되지 않은 사람들이 잘 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모두가 동일한 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어떤 형편에 있든 모든 형편을 초월해서 인간은 죄 아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눈에는 부자가 복 받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 하나님이 보실 때 그 역시 죄인일 뿐입니다.

 

 

사람을 부자 가난한 자, 높은 자 낮은 자로 구분하는 것은 우리의 기준이고 시각일 뿐이지 하나님이 보실 때는 단지 죄인일 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사람을 볼 때도 죄인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복의 여부도 죄를 기준으로 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재물이 복이 아니라 죄에서 구원 받은 것이 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 망한 것이라면, 그들이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게 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포로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포로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칠십년의 포로생활을 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다스리고 있고 말씀대로 이뤄짐을 체험하고 깨닫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포로 되지 않은 사람은 이것을 배울 기회가 없습니다. 하지만 포로된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된 자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이스라엘은 유다에 남은 자가 아니라 포로된 백성들인 것이고 따라서 포로 되게 하신 것은 그들을 참된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은 외적인 조건과 형편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일이 단지 좀 더 좋은 형편을 누리게 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힘든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런 문제로 인해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내 뜻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인도 받음을 믿게 되고 하나님께 마음을 두게 되는 것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이러한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 다스리시고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이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편한 삶을 산다고 해서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며 좋아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야 어떻든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은 신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편한 삶에 대한 욕망이 없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일은 나의 욕망과는 상관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생명으로만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를 현재의 처지와 형편으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현재의 처지와 형편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판단하고자 한다면 분명 생명의 문제는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무리 편한 삶을 산다고 해도 사망일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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