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4.06.08 10:26

(6강) 하나님의 안식

조회 수 3734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창 2:1-3http://onlycross.net/videos/gen/gen-020103.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설교>

 

2절에 보면 하나님이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고 안식하셨다고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는 여섯째 날로 끝났습니다. 일곱째 날에는 창조의 일은 없고 다만 안식하셨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셨다고 언급한 것을 보면 창조의 완성은 하나님의 안식이 포함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창조는 하나님의 안식을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창조의 일에서 하나님의 안식을 삭제한다면 창조는 어떤 의미로 남게 될까요?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다스리라고 하셨으니 인간을 위한 창조가 됩니다. 이것은 성경해석에서 아주 중요한 단초가 됩니다. 하나님의 안식을 위한 창조로 바라보느냐, 아니면 인간을 위한 창조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성경 해석의 방향이 전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쉼의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위해 힘든 노동을 하신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몸이 없는 하나님께 피곤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안식은 쉼의 의미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창조 기사를 보면 창조의 매 날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문구가 반복되어 있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은 하나님의 만족과 기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하루하루의 창조는 하나님 스스로의 만족과 기쁨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안식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보시기에 좋았던 기쁨과 만족의 완성이 안식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창조를 마치시는 날은 여섯째 날이 아니라 일곱째 날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복주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날은 단지 시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곱째 날이라는 시간에 복을 주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일곱째 날, 즉 안식일을 시간 개념으로 생각하면서 시간을 잘 지키는 것에 힘을 썼던 것입니다. 안식일이라는 날의 시작과 끝을 시간으로 계산해서 그 시간을 잘 지키는 것을 안식일을 지킨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복의 통로로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 주신 일곱째 날은 단순히 토요일이라는 날이 의미의 전부가 아닙니다. 일곱째 날은 하나님의 안식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처음 창조의 모습 그대로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복의 상태, 거룩의 상태는 말한 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처음의 모습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상이 이러한 복의 상태로 계속 존재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1장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1:28)고 하신 것도 세상이 복을 받은 상태로 지속되면서 하나님의 안식 또한 계속되기를 원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안식의 날이 계속되기 위해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처음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채소나 나무 열매를 먹으면서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안식은 계속되는 것이고 인간 또한 복의 상태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사탄의 유혹으로 인해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게 마음을 두게 되었고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에 관심을 둠으로써 선악과를 취하게 됩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것은 현대인들이 ‘나도 이렇게 되고 싶다’는 열망으로 사는 것과 하등 다르지 않습니다. ‘

 

 

교회를 부흥시키고 싶다’는 이것도 관심을 자신에게 두고 있는 인간의 욕망일 뿐입니다. 다만 욕망을 가리고 선한 것으로 포장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빙자할 뿐이지 사실은 지금 보다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욕망의 산물일 뿐입니다. 이로 인해서 복의 상태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안식 또한 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세상에서 이름을 떨치는 존재가 되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이름을 떨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인간의 욕망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포장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으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할 것을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인간으로 세상에 충만하다면 세상은 하나님의 위대함과 은혜로 충만할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에게 관심을 두게 된 인간에 의해 깨어진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위해 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위배되는 것이며 피조물의 본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 세상을 무너뜨리시고 영원히 만족하시고 기뻐하시며 안식하실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새창조이며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거룩한 사람으로 지음 받은 신자가 새창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을 새롭게 하셔서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의 본질을 보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마음을 두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도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은혜를 아는 백성으로 존재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 됨을 세상에 나타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겔 20:10-20절에 보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고 광야로 인도하셨는데 광야에서 안식일을 주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표징으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그 표징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어디에 있든, 어떤 형편에 있든 상관없이 그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염려할 것이 없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광야에서 만나로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주시면서 매일 그날 먹을 것만 거두게 하셨습니다. 만약 다음 날에 먹으려고 남겨두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못 먹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은 안식일이기 때문에 만나가 없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대신 여섯째 날에 안식일에 먹을 것 까지 거두게 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에 쉬었는데도 불구하고 먹을 것이 끊어지지 않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표징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쉬라는 것은 하나님으로 인해 먹고 산다는 것을 믿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내가 지금 누구의 힘으로 살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나의 수고와 노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산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안식일이라는 날을 주신 것입니다.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래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산다’는 것을 실감하십니까? 만약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라면 현재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최적의 것이며 우리는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늘 불만이 있습니다. 무엇으로도 만족보다는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말에는 쉽게 아멘 합니다. 단지 듣기 좋은 말에 동조해주는 수준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창조 상태를 생각해 보십시오. 벌거벗었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이 한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을 두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위대한 존재가 되어야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필요한 것은 벌거벗은 그 상태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되고자 하는 마음도 없이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습 그대로 살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만족이고 기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새롭게 지음 받은 새창조물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해달 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죽은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으로 인해 삽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감사의 길로 가면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러한 신자로 채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창조의 완성은 에덴보다 더 영광된 나라입니다. 주께서 다시 오셔서 이루실 영원한 이 나라가 여러분의 소망으로 굳건히 자리하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48 예레미야 (73강) 스마야의 편지 신윤식 2013.04.14 3223
447 창세기 (73강) 변하지 않는 본성 신윤식 2015.10.31 2600
446 에스겔 (73강) 거기에 있음이여 신윤식 2016.04.16 2300
445 예레미야 (72강) 포로된 의미 신윤식 2013.04.07 3322
444 창세기 (72강) 야곱의 사닥다리 신윤식 2015.10.24 3279
443 욥기 (72강) 사람보다 크심 file 신윤식 2018.09.29 17048
442 에스겔 (72강) 물을 맑게 하여 신윤식 2016.04.09 2501
441 욥기 (71강) 엘리후의 등장 file 신윤식 2018.09.22 1151
440 창세기 (71강) 에서의 모방 신윤식 2015.10.08 2570
439 에스겔 (71강) 바로에 대한 애가 신윤식 2016.04.02 2304
438 예레미야 (71강) 미래와 희망 신윤식 2013.03.31 3518
437 에스겔 (70강) 지하로 내려감 신윤식 2016.03.19 2631
436 창세기 (70강) 에서의 분노 신윤식 2015.10.03 2620
435 욥기 (70강) 논쟁 종결 file 신윤식 2018.09.15 903
434 예레미야 (70강) 거짓 선지자 하나냐 신윤식 2013.03.24 3705
433 스가랴 (6강) 환상(저주와 악) 신윤식 2011.04.10 4062
» 창세기 (6강) 하나님의 안식 신윤식 2014.06.08 3734
431 예레미야애가 (6강) 하나님의 성실 신윤식 2014.03.16 3136
430 미가 (6강) 하나님의 구원 신윤식 2010.08.30 4481
429 예레미야 (6강) 포로된 이유 신윤식 2011.11.06 3938
Board Pagination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 31 Next
/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