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4.02 16:34

(71강) 바로에 대한 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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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2:1-10http://onlycross.net/videos/eze/eze-32011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열두째 해 열두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

3.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많은 백성의 무리를 거느리고 내 그물을 네 위에 치고 그 그물로 너를 끌어오리로다

4.내가 너를 뭍에 버리며 들에 던져 공중의 새들이 네 위에 앉게 할 것임이여 온 땅의 짐승이 너를 먹어 배부르게 하리로다

5.내가 네 살점을 여러 산에 두며 네 시체를 여러 골짜기에 채울 것임이여

6.네 피로 네 헤엄치는 땅에 물 대듯 하여 산에 미치게 하며 그 모든 개천을 채우리로다

7.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을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며 달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8.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둠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내가 네 패망의 소문이 여러 나라 곧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들에 이르게 할 때에 많은 백성의 마음을 번뇌하게 할 것임이여

10.내가 그 많은 백성을 너로 말미암아 놀라게 할 것이며 내가 내 칼이 그들의 왕 앞에서 춤추게 할 때에 그 왕이 너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할 것이며 네가 엎드러지는 날에 그들이 각각 자기 생명을 위하여 무시로 떨리로다

 

 

<설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은 영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 암기하고 있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절)는 구절만 봐도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신자에게 영생은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얻은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영생을 얻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생을 얻은 자, 즉 영생을 가진 자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 6:47,48절에서도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영생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임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 2:25)는 말씀처럼 영생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이 약속은 그리스도가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성취되었기에 신자는 이미 성취된 복의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신자의 정체성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영생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약속이 성취된 복의 세계에 속한 것이 신자이며 이것이 신자의 정체성입니다. 영생을 가진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영생이 세상과 달리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영생을 하나님의 복으로 믿으면서도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확고하게 붙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끝까지 유지하십니다. 따라서 신자 또한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약속만을 바라보며 약속이 아닌 것은 관심두지 않고 복의 세계에 속한 약속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살든 신자는 영생을 가진 자로 세상과 함께 하지 않고 약속의 자녀로써 가야 할 길로만 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실력으로는 흔들리지 않고 약속의 자녀 된 길로 가지 못합니다. 마귀의 유혹이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은 세상 일로 인해 아파할 때 마귀는 우리가 위로 받고 싶은 것을 가지고 다가오기에 보이지 않는 약속의 길을 붙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약속의 자녀를 돌보십니다. 이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약속의 자녀와 자녀가 아닌 자의 길이 다른 이유이고, 신자가 두려움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분명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이것이 우리 인생에 분명한 답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이 답을 가진 자로 살아간다면 신자는 보이는 것을 신뢰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잘못 됨을 자신의 삶으로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이 주인 되어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약속 따윈 믿지 않습니다. 보이는 세상만이 신뢰의 대상이고 힘으로 여깁니다. 그것이 잘못된 길임을 증거 하는 것이 신자라면, 신자는 자신이 세상 속에서 어떤 길을 가는지 끊임없이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정체성인데도 불구하고 정체성은 잃어버리고 신자라는 껍데기만 걸친 채 흉내만 내는 것이 현대 기독교인의 실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본문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저는 세상의 현실을 봅니다. 패망이라는 자기의 현실을 보지 못하고 힘에 취해 살다가 모든 것이 무너지는 바로 왕에게서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이 감당해야 할 현실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분명한 것은 적어도 신자의 눈에는 세상이 사는 모습들이 좋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신자의 눈에 세상이 사는 것이 좋아 보이고 자신도 세상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생, 영생을 가진 신자, 끝까지 유지되는 약속, 그 모든 것이 마음에서 상실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의 말씀에서 또 다시 약속 밖에 있는 세상의 현실이 어떠한가를 분명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절을 보면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고 말합니다.

 

 

29:3절에서처럼 또 다시 애굽을 악어로 표현합니다. 여러 나라는 애굽의 바로 왕을 사자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자보다 악어가 더 강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자는 흔히 백수의 왕으로 불립니다. 한 마리의 수컷이 여러 암컷들을 거느리는 습성으로 인해 수사자는 강한 왕의 상징으로 여김 받기도 했습니다. 여러 나라가 바로 왕을 그처럼 강한 힘으로 애굽을 다스리는 왕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바로 왕을 사자로 여겼다는 것은 바로 왕을 부러워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누구도 감히 대적하려고 하지 않는 사자는 여러 나라의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로 왕은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강을 더럽히는 악어와 같은 존재였을 뿐입니다.

 

 

바로 왕도 하나님으로 인해 존재합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사자도 악어도 하나님의 허락으로 존재하고 하나님의 뜻이면 언제든 존재의 시간은 끝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왕을 비롯한 세상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의 힘으로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특히 힘을 가진 자들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스스로 산다고 여겼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책임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로를 강을 더럽히는 악어로 빗대어 말씀하신 것도 그런 의미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조치하실까요?

 

 

13,14절을 보면 “내가 또 그 모든 짐승을 큰 물 가에서 멸하리니 사람의 발이나 짐승의 굽이 다시는 그 물을 흐리지 못할 것임이여 .그 때에 내가 그 물을 맑게 하여 그 강이 기름 같이 흐르게 하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물을 맑게 하기 위해 물을 더럽히는 주범인 악어를 멸하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세워진 뜻이라면 악어의 운명은 패망 밖에 없습니다. 패망의 때가 언제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악어가 더럽힌 물을 맑게 하시고 그것을 위해 악어를 멸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악어는 이미 패망이라는 비참한 현실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바로 왕에 대해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절에 보면 하나님은 악어를 그물로 끌어 올려 뭍에 버리며 들에 던져 공중의 새들이 악어 위에 앉게 하고 온 땅의 짐승이 그를 먹어 배부르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또한 그 살점을 여로 산에 두며 시체를 여러 골짜기에 채우신다고도 합니다.

 

 

계 19:17-18절에 보면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의 바로 왕의 운명을 보여주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말씀으로 우리는 세상을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부요나 힘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인지 아닌지가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라면 약속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영생을 가진 자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렇게 약속의 자녀인 신자는 세상에 심판을 선포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계 19:7-8절을 보면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혼인기약이 이르렀음을 아는 신부는 자신을 준비하게 됩니다. 어린양의 신부가 자신을 준비하는 것은 신부에게 허락된 세마포 옷을 입는 것인데, 그것을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즉 현재를 살아가는 신자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 옳은 행실인 것입니다. 옳은 행실로 인해 신자의 신자 됨이 증거 되는 것이고 세상이 가는 길과는 다른 길에 있으며 그 길이 곧 생명이라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과연 옳은 행실이 있는 것입니까?

 

 

신자에게 있어야 할 옳은 행실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생을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의 존귀함을 깨닫고 세상의 어떤 것을 가진 것보다 예수님의 사랑에 붙들린 것을 복의 전부로 여기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이러한 옳은 행실이 있는 길로 가도록 도우시고 돌보시기 위해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본문에서는 애굽의 바로 왕을 강을 더럽히는 악어로 표현하는데, 악어는 다른 한편으로 보면 “땅에 기는 길짐승 중에 네게 부정한 것은 이러하니 곧 두더지와 쥐와 큰 도마뱀 종류와 도마뱀붙이와 육지 악어와 도마뱀과 사막 도마뱀과 카멜레온이라”(레 11:29-30)는 말씀처럼 부정한 짐승입니다.

 

 

부정한 짐승의 특징은 땅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땅에 밀착되어 있는 동물의 특성을 들어 부정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부정한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심판입니다. 바로 왕이 제 아무리 강하고 부성하고 부요하다 해도 그는 부정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벗어나 하늘에 속한 자로 존재하는 신자를 복되다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드러나지 않고 하늘의 영광에 감추어져 있는 복이지만 신자는 변하지 않고 끝까지 유지되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복의 복됨을 알고 기뻐하며 하늘을 소망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승리를 높은 위치에 오르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때문에 적게 가진 자는 많이 가진 자 앞에서 낮아지게 되고 패배자로 여김 받게 됩니다. 불교인보다 기독교인의 수가 적다고 하면 기독교인들은 패배했다는 인식을 하는 것도 세상 속성입니다. 그래서 예배당 주변에 예배당보다 큰 절이 있으면 ‘하나님께 영광되지 못하고 하나님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다’는 말을 하면서 절보다 더 큰 예배당을 지어야 한다는 허무맹랑한 말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약속의 자녀에게 주신 것은 영생이고 영생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오셔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만이 영생을 가졌고 신자의 존재성은 그것으로 확고해졌습니다. 이처럼 신자를 영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생을 가진 자로 살게 하시는 것은 신자의 옳은 행실로 말미암아 세상이 부정하고 더러우며 패망으로 끝난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함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생을 가진 신자에게서 증거 되어야 할 옳은 행실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로 기뻐하는 것이기에 신자는 항상 세상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져야 할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말하는 우리의 삶은 세상으로 치우쳐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세상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합니다. 여러 가지 염려와 불안으로 마음이 무거워진 채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녀에게 은총으로 선물하신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를 잊고 삽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러한 자신에 대한 애통함이 없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말씀에 대한 감각이 둔해진 것입니다.

 

 

세상은 애굽의 바로 왕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본문을 보시면서 바로 왕을 복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바로 왕의 현실은 본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결국은 비참입니다. 때문에 바로 왕에 대해 슬픈 노래를 부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슬픈 노래는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곧 바로 왕처럼 되기를 원했고 부러워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여러분보다 잘나게 보이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들에 비해 여러분은 가진 것이 없는 초라한 존재로 여겨질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유혹으로 인해 여러분께 주어진 존귀한 것이 있음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저주 받은 땅에서 건지시고 하늘에 소속된 자가 되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으로 주어진 영생이 있음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주의 말씀에 마음을 두십시오. 말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은 끝까지 유지될 것이고 약속에 따라 세상은 약속 밖에 있는 자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으로 세상의 그 같은 결국에 대해 보여주고 계십니다.

 

 

잠시 동안 누리는 것에 마음을 두지 마시고 영원한 생명에 마음을 두십시오. 신자의 복됨은 영원에서 찾아야 합니다. 때문에 ‘나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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