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4.09 17:13

(72강) 물을 맑게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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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2:11-16http://onlycross.net/videos/eze/eze-32111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1.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바벨론 왕의 칼이 네게 오리로다

12.나는 네 무리가 용사 곧 모든 나라의 무서운 자들의 칼에 엎드러지게 할 것임이여 그들이 애굽의 교만을 폐하며 그 모든 무리를 멸하리로다

13.내가 또 그 모든 짐승을 큰 물 가에서 멸하리니 사람의 발이나 짐승의 굽이 다시는 그 물을 흐리지 못할 것임이여

14.그 때에 내가 그 물을 맑게 하여 그 강이 기름 같이 흐르게 하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5.내가 애굽 땅이 황폐하여 사막이 되게 하여 거기에 풍성한 것이 없게 할 것임이여 그 가운데의 모든 주민을 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16.이는 슬피 부를 노래이니 여러 나라 여자들이 이것을 슬피 부름이여 애굽과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이것을 슬피 부르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설교>

하나님께서 애굽에 바벨론을 보내어 멸하시겠다고 합니다. 애굽이 바벨론보다 강한가 약한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바벨론에 붙여서 멸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나는 네 무리가 용사 곧 모든 나라의 무서운 자들의 칼에 엎드러지게 할 것임이여 그들이 애굽의 교만을 폐하며 그 모든 무리를 멸하리로다”(12절)는 말씀으로 분명히 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애굽을 멸하신다는 것에 대해 전혀 의아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나라이기에 멸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애굽을 악한 나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었던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에 대해서도 역시 의아해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조상 대대로 우상을 섬기는 죄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애굽이든 이스라엘이든 그리고 다른 이방 나라든 멸망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기에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불평도 불만도 갖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 나라이기 때문에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기에 도출될 수밖에 없는 죄에 대한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처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멸망을 받았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 나라의 죄의 특성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던 이스라엘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도 이스라엘이나 애굽과 동일한 죄의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우리 또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을 받아야 할 존재임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과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당연하게 여겼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신다 해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이 행하신 어떤 일에도 불의함은 없으며 그 일이 설령 나에 대한 심판이라 할지라도 선하신 하나님의 당연한 조치임을 알게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해 신자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심판이 당연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악함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도구 삼아 애굽의 교만을 폐하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교만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교만을 폐하시는 분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애굽과 같은 교만이 없습니까? 없다면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애굽의 교만이 우리에게도 있다면 우리 또한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애굽의 교만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애굽의 교만이 곧 인간의 죄의 모습이기에 ‘모든 인간이 애굽과 같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즉 애굽의 교만은 애굽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교만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해도 여건만 주어지면 언제든 도출되는 것이 교만이기에 ‘나는 교만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교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 구원에 집착을 하면서 자기 구원을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해 슬픈 노래를 부르라는 말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아직 멸망 받기 전의 애굽은 여전히 강하고 부요하며 바로 왕은 그 나라를 다스리는 강력한 힘을 가진 군주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러한 애굽을 피난처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무너졌을 때 아직 유다에 남아 있던 백성들은 애굽으로 피신했던 것입니다.

 

 

렘 42:14절에 보면 “또 너희가 말하기를 아니라 우리는 전쟁도 보이지 아니하며 나팔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양식의 궁핍도 당하지 아니하는 애굽 땅으로 들어가 살리라 하면 잘못되리라”고 말합니다.

 

 

유다에 남은 백성들에게 애굽은 전쟁이 없고 양식의 기근도 당하지 않는 살기 좋은 곳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애굽 땅으로 들어가 살면 잘못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께 애굽은 교만한 존재였을 뿐이고 심판의 대상이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에 남은 백성들이 전쟁과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간다 해도 전쟁과 기근이 애굽으로 따라갈 것이고 거기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렘 42:15-17)

 

 

그렇다면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었다면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당연히 애굽으로 가지 않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렘 43:2절에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는 애굽에서 살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고 말한 것처럼 오히려 선지자가 거짓을 말하는 것으로 치부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하실 분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들에게 애굽은 단지 살기 좋은 나라였을 뿐이며 자신들의 몸을 의탁하기에 충분한 피난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 또한 자신들의 뜻을 옹호해주는 자기편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자신을 위해서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행동의 정당성을 꾀하기 위해 하나님을 끌어 들이는 교만인 것입니다.

 

 

렘 42:10,11절에 “너희가 이 땅에 눌러 앉아 산다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난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너희가 두려워하는 바벨론의 왕을 겁내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를 구원하며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지리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다라 유다에 남은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그 땅에 눌러 앉아 사는 것입니다. 그들의 환경은 고통이라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말씀만 믿으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살 길을 찾아 나섰고 선택한 나라가 애굽이었습니다. 그들 눈에는 애굽이 든든한 피난처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애굽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애굽의 교만과 다르지 않기에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이방인 애굽과 다를 바 없이 이방인이었던 것입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 왕을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다고 하십니다.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었다는 것은 악어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비록 예루살렘이 무너졌다 해도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무너뜨린 뜻을 생각하며 무너진 이유가 자신들에게 있음을 알고 회개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살 길을 찾아 움직이는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였습니다. 자신이 애굽을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물을 휘저어 강을 더럽히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 물을 맑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악어가 발을 휘젓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큰 악어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죽이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악어를 그물로 끌어 올려 뭍에 버리며 들에 던져 온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이 더렵혀진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내가 또 그 모든 짐승을 큰 물 가에서 멸하리니 사람의 발이나 짐승의 굽이 다시는 그 물을 흐리지 못할 것임이여 그 때에 내가 그 물을 맑게 하여 그 강이 기름 같이 흐르게 하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3,14절)고 말씀합니다.

 

 

모든 짐승을 멸하신다는 것은 물을 더럽히는 것이 애굽의 바로 왕만의 일이 아니라 짐승 자체의 특성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고자 하는 것 자체가 짐승이며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멸하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발이나 짐승의 굽이 다시는 물을 흐리지 못하게 하고 더럽혀진 물을 맑게 하기 위해 하시는 일이 죽이시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죽이심으로 가만히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물을 맑게 하여 그 강이 기름같이 흐르게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가만히 있는 자입니까 아니면 큰 악어인 바로 왕처럼 발을 휘저어 물을 더럽히는 자입니까. 가만히 있다면 애굽의 교만과 우리는 상관이 없기 때문에 본문의 내용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발을 휘저어 물을 더럽히고 있다면 애굽을 멸하신다는 말씀은 우리 이야기가 됩니다.

 

 

출 14:13,14절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말합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고 있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뜻에게 방해 받지 않고 세상에 펼쳐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구원을 위해 살아갑니다. 애굽 군대가 쫓아오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구원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도무지 살아날 길이 없다고 생각되자 모세를 원망한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모세를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는 것은 구원이 하나님께 속했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힘이나 열심을 요구하는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데리고 오직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게 된 신자라면 당연히 가만히 있게 됩니다.

 

 

현대 교회는 이것을 참지 못합니다. 자기의 뜻이 있게 때문입니다. 세상의 복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도 복을 주시는 하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 부흥에 뜻을 두고 있어도 역시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전도가 없이 교회는 부흥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인간의 상식이고 계산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은 신앙의 게으름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는 죄라고 협박하며 행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발로 물을 휘젓는 것이고 강을 더럽히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애굽의 교만에 일치되는 것이고 반드시 하나님이 멸하시는 것입니다.

 

 

겔 36:16-18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고국 땅에 거주할 때에 그들의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행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 위에 쏟아”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행위로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땅을 더럽혔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었는데 우상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자기의 뜻과 자기의 구원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시고 무너뜨린 것입니다. 인간이 더럽힌 땅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을 죽이시는 분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자기를 위해 자기의 뜻으로 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일지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을 말하고 내세우면서 살아온 삶의 행적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발을 휘젓지 않고 가만히 있어서 물을 더럽히지 않는 믿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발을 휘젓고 있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내가 원하는 인생과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강을 흙탕물로 만드는 하나님의 원수들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럽힌 강을 맑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행하시는 조치는 항상 나를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우리를 가만히 있게 하기 위해 우리를 죽이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을 해석할 때는 ‘나는 살아야 한다. 나는 구원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죽어야 한다. 나는 지옥가야 한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그리스도라는 바른 방향의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고전 15:3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한 것을 보면 사도 바울의 매일의 소원은 죽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뭘 할까가 아니라 죽는 것에 뜻을 두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도 자신의 본성에 살고자 발버둥치는 악의 세력이 있음을 알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죽이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십자가에 세우심으로 나를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왔던 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죄였음을 알게 하시고 내가 날 위해 움직이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멸하실 이유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구원이 전적으로 여호와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해 자기의 행함과 공로는 사라진 채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만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행함, 열심히 더럽혀진 강을 맑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입니다.

 

 

고후 4:10-11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죽음에 넘겨짐으로 예수님의 생명에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같은 구원 사건은 하나님이 홀로 행하시고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가만히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 사건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거나 믿음이 아닌 것으로 의심하게 되면 결국 자신의 행함을 동원하게 됩니다. 자기의 행함을 보고 믿음에 안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애굽의 교만이며 악어가 발을 휘저어 강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로 가만히 있어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더럽힌 물을 맑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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