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4.16 16:33

(73강) 거기에 있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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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2:29-30http://onlycross.net/videos/eze/eze-32293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9.거기에 에돔 곧 그 왕들과 그 모든 고관이 있음이여 그들이 강성하였었으나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있겠고 할례를 받지 못하고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누우리로다

30.거기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내려간 북쪽 모든 방백과 모든 시돈 사람이 있음이여 그들이 본래는 강성하였으므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부끄러움을 품고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웠고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설교>

성경을 신자가 기독교인답게 살아가야 할 모범적인 삶의 실천에 대한 교훈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들도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원을 담고 있음을 말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와 구원은 입술의 고백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을 통해 증거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삶에서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절 상반절)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신자에게 복음은 입술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에 합당한 생활로 나타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십자가 복음은 분명 입술로만 고백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생활에서 나타나고 증거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지해야 하는 것은 도덕과 윤리를 기초로 구축된 모범적이고 귀감이 되는 생활이 아니라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복음을 아는 신자에게만 가능합니다. 이 말은 도덕적 실천과는 전혀 다른 생활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에 합당하다는 것은 복음과 일치되는 생활이라는 뜻이고 복음은 도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도덕과 연결하여 이해하게 되면 복음은 도덕으로 희석된 복음 아닌 복음, 즉 다른 복음이 될 뿐입니다.

 

 

복음은 인간을 만족시키고자 하지 않습니다. 다만 부족함이 없는 충만한 생명의 세계를 증거 할 뿐입니다. 인간의 반응에는 관심두지 않습니다. 애당초 복음에 반응하고 복음에 의해 움직일 사람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시기로 작정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으로 그 백성을 찾아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게 함으로 세상에 은폐되어 있는 생명의 충만함을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복음으로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은 개인의 주관적인 만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으로 인한 기쁨이고 감사며 충만인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어떤 복음의 세계를 담고 있을까요? 본문이 요구하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무엇일까요? 성경에 담겨 있는 복음의 세계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도록 은폐되어 있습니다. 은폐되어 있기에 누구도 볼 수 없고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본문의 내용이 그 심령에 들어오는 사람만이 은폐된 복음의 세계에 눈이 열리고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즉 본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서 생명을 보게 되는 것이 은혜이며 그 은혜로 마음이 충족되는 그가 복음의 세계에 눈이 열린 신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가 청중들에게 은혜가 되고 만족이 되기를 바라는 욕망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고 다만 말씀에 담긴 복음의 세계에만 집중하여 생명을 증거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할례 받지 못한 자에 대한 이 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할례 받지 못한 자’라는 말은 19절부터 거의 매 구절 반복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할례의 의미를 알아야 하고 할례 받지 못한 자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모두 죽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죽음에 속한 자를 ‘할례 받지 못한 자’로 말하는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이르라 너의 아름다움이 어떤 사람들보다도 뛰어나도다 너는 내려가서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와 함께 누울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선지자에게 애굽을 위하여 슬피 울라고 하시면서 그들에게 이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20절에서 “그들이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엎드러질 것임이여 그는 칼에 넘겨진 바 되었은즉 그와 그 모든 무리를 끌지어다”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가 곧 죽임을 당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21절의 “용사 가운데에 강한 자가 그를 돕는 자와 함께 스올 가운데에서 그에게 말함이여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 곧 칼에 죽임을 당한 자들이 내려와서 가만히 누웠다 하리로다”는 말씀에서도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를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 언급합니다. 따라서 할례 받지 아니한 자는 곧 죽음의 세계에 속한 자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22절부터 보면 ‘거기에’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거기’는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누워 있는 죽음의 세계를 뜻합니다. 거기에 애굽이 누워 있고 앗수르와 그 온 무리가 있고(22절), 엘람이 있고(24절), 메섹과 두발과 그 모든 무리가 있고(26절), 에돔의 왕들과 그의 모든 고관들이 있습니다(29절),

 

 

아름다워서 주변 나라들의 부러움을 사고 강성하여 사람을 두렵게 하는 존재였다 할지라도 모두 거기에 모여 함께 눕게 됩니다. 거기가 바로 죽음의 세계, 곧 음부이며 그곳이 바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집결지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의 무리를 위하여 슬피 울라는 말씀은 사실상 할례 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애가라 할 수 있습니다.

 

 

애굽을 포함한 모든 이방 나라는 할례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할례 받은 자에 속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 언약을 세우셨고 그 때부터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할례를 행하였기에 이스라엘은 대대로 할례를 행해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할례를 행한 자로서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집결하는 죽음의 세계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까? 그런데 왜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할례 받지 않은 자가 죽임을 당한 자를 뜻하고 그들이 모두 함께 누워 있는 거기가 죽음의 세계라면 할례 받았다는 것은 죽음에서 건짐 받은 것을 뜻합니다. 인간은 할례 받지 않은 자로 태어납니다. 이스라엘이 몸에 할례를 행했다 해도 난지 팔 일만에 행했기에 그들 또한 태어날 때는 할례 받지 않은 자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인간도 날 때는 이방인이요 죽음의 자식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할례언약에는 ‘너희는 날 때부터 죽음에 속한 자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죽음에 속한 자에게 죽음을 이기는 할례를 언약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즉 할례가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 되고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죽음을 이기는 언약으로 세워진 할례는 이스라엘이 행하는 몸에 흔적을 남기는 할례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몸에 남기는 할례를 하나님의 백성된 것과 구원의 증표로 여겼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후손인 자신들을 특별히 생각하였기 때문에 할례로 다른 이방인과 구별하였고 자신들이야말로 날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언약으로 세우신 것은 아브라함이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언약을 세우시고 하나님이 책임지고 이루시지 않는다면 아브라함 스스로 하나님의 불러내심에 순종하며 믿음의 길로 갈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대단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 또한 특별한 존재로 여기시지도 않습니다.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이삭, 야곱,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등등 누구라 할지라도 영웅이 아니며 그들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지키고 유지한 것이 아니라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시고 행하심으로 되어진 일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할례를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만 생각하며 자신들을 대단한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할례가 하나님께서 자비와 은혜로 그들을 붙드시고 긍휼의 자리로 불러내셨다는 의미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신 7:8-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부르신 자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며 자기를 위한 길로만 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자칭 여호와를 사랑한다고 하였지만 실상은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이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았다 하나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기를 싫어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부름 받은 복의 자리에서 긍휼과 자비가 복으로 채워져야 했었지만 이방 민족을 바라보며 그들이 누리는 것으로 채워지기를 원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미워하는 것이며 비록 그들의 몸에 할례가 있다 해도 이미 할례의 의미를 잃어버렸기에 할례 받지 못한 자들과 다를 바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 누운 죽음의 자리에 이스라엘도 함께 누울 수밖에 없음을 본문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잘못은 몸의 할례를 백성된 증표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몸의 할례가 전부였고 자부심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몸의 할례를 언약으로 세우신 것은 몸의 할례를 통하여 참된 언약의 정신을 바라보라는 요구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신 10:16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신 30:6절에서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마음의 할례에 있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실 것이고 그것이 곧 생명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할례는 마음의 할례이며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몸에 할례를 행한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마음의 할례가 없다면 할례 받지 못한 자에 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죽은 자들이 누운 거기에 이스라엘도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몸에 할례를 행하지 않기 때문에 할례를 구원의 증표로 삼지는 않지만 이스라엘과 같은 중대한 오류의 심각성은 여전히 있습니다. 그것은 할례가 아닌 다른 것으로 자신의 구원을 확인하고 신앙의 우월감으로 삼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든 성경읽기든 전도든 구제든 상관없이 자신이 행하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야 말로 인간에게 있는 본능적 종교심에 의해 나타나는 심각성이며 그로 인해 신앙이 왜곡되는 중대한 문제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한다 해도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베푸신 것만 보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행한 것을 앞세워 하나님께 나가고자 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오히려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동일하게 심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때문에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이나 할례 받은 이스라엘 모두 심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이것을 렘 9:25-26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다면 이방인과 다를 바 없기에 그들이 죽임을 당한 것처럼 마음의 할례가 없는 이스라엘도 죽임을 당하여 거기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눕는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행 7:51절의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는 말씀을 보면 스데반이 자신을 재판하는 공회에 앉은 사람들을 향하여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으로 일컫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입니다. 스데반이 보기에 그들은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리긴 하였으나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고 죽이는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심으로 받게 되는 마음의 할례는 무엇일까요?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고 생명에 있게 하는 마음의 할례는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으로서만 가능하기에 믿음을 주셨다는 것은 죽음에 있는 우리를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부르시고 생명에 있게 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할례가 있는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며 긍휼과 자비하심에 감사하게 될 뿐 육체의 자랑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라도 자기 믿음에 우월감을 가지고 자기 행함을 바라본다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이며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 모이는 죽음의 세계, 거기에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의 할례가 그들이 특별하고 대단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듯 하나님이 은총의 선물로 주신 믿음 또한 우리가 특별한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크고 대단한가를 나타내는 증거와 확증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받은 신자는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높이고 자랑하는 방향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설교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린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고 말씀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본래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었을 뿐입니다. 죽음의 세계 거기가 우리가 영원히 누워있어야 할 자리였을 뿐입니다. 죽음의 그 자리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으킴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공허하게 들리지 않고 여러분의 마음을 채우는 복음으로 들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복음으로 인해서 생명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이 여러분에게 생명의 충만함으로 느껴지고 자리한다면 여러분은 말씀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여러분을 할례 받지 못한 자와는 다른 길로 가게 할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유혹 속에서도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생명의 그 길로 가게 할 것입니다. 신자는 그것으로 복된 자이며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할례 받지 못한 사람이 누워 있는 거기에서 건짐 받은 사실이 여러분의 기쁨과 감사로 채워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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