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07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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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성경의 대전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다. 따라서 성경이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불변의 원칙이지만 성경의 모든 내용을 그리스도로 연결하여 해석하는 작업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예수님이 직접 등장하여 말씀하시고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가 언급되는 신약성경에 비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아예 없는 구약 성경을 그리스도로 연결하여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약이 구약과 비교해 해석이 쉽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우리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구약의 역사 이야기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찾기가 난감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묵상 구절 또한 예외가 아니다.  

 

 

사건은 하나님이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으로 시작한다. 가인은 그 일로 인해 몹시 분하여 안색까지 변한다. 가인으로서는 자신의 제사에 잘못이 있거나 아벨의 제사에 비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제사에서 하나님이 받지 않을만한 문제점을 찾았다면 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가인은 그저 하나님이 자신과 아벨을 차별하시고 아벨에게만 관심을 두시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이것이 가인에게 분함이 된 것이다.

 

 

이처럼 분하여 안색이 변한 가인에게 하나님은 어찌하여 분해하고 안색이 변하느냐라고 하신다. 분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가인에게 하신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전반에 깔린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인한 감사가 아니라 가인처럼 분함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나는 열심히 하나님을 신앙하며 살았다고 자부하는데 그런 나를 외면하고 돕지 않으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 마음이 분함으로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4:7)라는 질문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인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큰 울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하여 안색이 변한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고 말씀한다. 무슨 뜻일까? ‘선을 행하면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선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하나님이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을 선을 행하지 않은 것으로 지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일하신다 해도 분노하지 않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라는 말은, ‘사탄이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지 않고 분노하는 죄를 짓게 하지만 그러한 죄를 다스려 이겨야 한다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물론 가인이 하나님께 분노하는 죄를 다스릴 수 있었다면 아벨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자는 믿음으로 분노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라는 말도 가능하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것도 분노라는 죄가 문에 엎드려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는 의미로 말하면서 신자는 날마다 자기를 경계하고 분노를 다스려 죄를 이겨야 한다. 그것이 믿음의 능력이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오늘의 성구 묵상은 아주 훌륭하게 마무리된다고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없다. 도무지 가능하지 않은 비현실적이고 공허한 말일 뿐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생각은 묵살하고 인간의 생각으로 선을 찾고 이루고자 하는 종교의 모습만 갖추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먼저 선을 행하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선하다고 인정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가인은 제사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했을 것이다.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즉 가인은 자신의 정성과 열심이 담긴 제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선을 행하지 않은 것으로 보신 것이다.

 

 

그러면 선을 행하는 제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아벨의 제사에서 답을 찾으면 된다. 가인과 아벨 제사의 차이는 제물에 있다. 아벨이 드린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이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택한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것이다.

 

 

11:4절에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가 아니라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신다.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로 인정되는 것은 제물로 인한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관심이 제사가 아닌 제물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이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신 것은 아벨이 가인보다 나아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취지에 맞는 제물이 아벨을 구원했다는 의미로 보면 된다. 이것이 친히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받으심으로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의 신자가 하나님께 받은 바 된다는 구원의 원칙을 보여준다.

 

 

따라서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다는 가인의 발상으로 생각하면 된다. 하나님은 이것을 죄로 규정하시며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하신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면 가인은 날마다 모든 일에서 죄를 만나는 상태에 있다. 그런데도 자신의 제사에 가치를 두면서 선을 행하지 아니하기에 죄를 알지 못하고 분하여 안색이 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인이 오늘날 우리의 실상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죄가 원하는 것은 우리를 십자가에 피 흘려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아닌 나에게 관심을 두고 내가 행한 일에서 가치를 찾는 인간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죄를 다스리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분노를 다스리라는 것일까? 아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에 관심을 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께 관심을 두고 예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것이 죄를 다스리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 한다.

 

20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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