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0 14:36

벧전 3:19

조회 수 33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벧전 3:19)

 

 

세상에는 애초에 하나님이 거룩하게 여기시는 성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세상에 성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결과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기 믿음으로 거룩하고 선한 행위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하나님이 의로 여기시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성도는 없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성도 됨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신(벧전 3:18) 십자가 믿음은 불가능하다. 오늘 묵상 본문은 이러한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

 

 

대개는 본문의 옥을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자가 가는 지옥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영으로 지옥에 가서 그곳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는 뜻으로 해석하면서 그 의미를 찾는 일에 난감해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지옥을 찾아가셨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미 심판을 받아 지옥에 있는 자들에게 선포할 것이 무엇인가? 라는 의문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지옥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면 지옥에서도 예수를 믿을 기회가 주어진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톨릭은 예수님이 가신 옥을 지옥이 아닌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있는 연옥으로 말하기도 한다. 가벼운 죄를 지어 정화의 가능성이 있는 영혼들이 있는 연옥에 가셔서 복음을 전하여 천국으로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는 예수님이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심판을 선포하기 위해 가신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영원한 심판에 있는 지옥에 가셔서 굳이 심판을 선포하셨다는 것도 억지로 답을 찾는 궁색한 해석에 가깝다.

 

 

옥은 죽은 자들이 갇혀 있는 세계다. 그런 점에서 지옥으로 해석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지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20절에 보면 옥에 있는 영들을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노아 때에 심판을 받은 자들과 같은 영의 사람들, 다시 말해서 그들과 인간 됨이 같다면 모두 옥에 있는 자라는 뜻이 된다. 과연 그들이 누구일까?

 

 

17:27절을 보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라고 말씀한다. 바로 이들이 옥에 있는 영들이다.

 

 

노아 때의 사람들은 노아가 만들고 있는 방주를 보면서도 심판을 믿지 않았다. 그 이유는 노아의 방주가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가는 자기의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무가치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은 이유이며 인자의 때에도 이들과 같은 인간에 의해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가치한 것으로 무시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자기 육신을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는 무가치하고 관심 밖의 일로 버림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17:26)라고 말씀한다.

 

 

따라서 옥은 부활의 주로 오신 예수님이 자기 육신의 가치를 위해 사는 인간에 의해 버림받은 이 세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자기가 죄로 인해 죽은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 자들에게는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가는 육신의 일이 중요하다. 이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는 십자가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무가치한 것이다. 노아 때의 사람들도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에 심판을 위한 방주를 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이 노아의 때와 같은 영의 인간이 갇힌 옥이며 죄를 알지 못한 죽은 자의 세상이고 지옥이다. 결국 우리가 옥에 있는 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이 부활의 주로 오셔서 말씀을 선포하신 것이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신 것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육신으로 오셨지만 성령을 받으시고 부활의 주로 일하신 것이 곧 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은 신자를 육신이 아닌 영적인 존재로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노아의 날에 방주에서 구원을 얻은 자는 겨우 여덟 명이라고 말한다. 이들이 심판을 받은 자들보다 더 나은 인간이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을 뿐이다. 노아 역시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의 존재라는 것을 알았기에 방주에서 나온 후에 정결한 짐승을 제물로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은 희생 제물의 대신 죽음 위에 펼쳐지는 생명의 사건이라는 것이 선포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이 선포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죄로 인한 죽음의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어떤 대우를 받을까? 단지 죄를 용서해주고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구원의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난은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만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할 뿐, 자신은 고난과 상관없이 세상에서의 형통과 평안을 추구한다. 이것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가는 것을 삶의 가치로 여기는 노아 때의 사람과 같은 방식의 삶에 있는 인간의 현실이다.

 

 

그런데 20절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라고 말한다.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면 물이 구원의 능력이 되었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홍수에서 구원을 얻은 노아 방주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다. 물에서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례와 연결하여 이해하면 된다. 세례, 즉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라고 말한다(벧전 3:21). 세례는 죽음에서 건짐 받은 것을 의미한다. 구원은 죽음을 통과한 자들에게 해당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하신 예수께 속한 것이 예수와 함께 죽음을 통과하여 죽음에서 건짐 받은 것이고 그러한 구원을 가르치는 표로 세례가 있는 것이다.

 

 

세례는 자신이 죽음에 있음을 아는 자들에게 의미 있다. 그들에게서 부활의 주가 존귀한 분으로 높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죽은 자임을 알게 하는 것이 노아 홍수의 물이기 때문에 물로 말미암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 심판으로 인해서 방주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죽은 자임을 알게 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높이고 자랑하는 성도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행위로 말할 수 있다.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심으로 세상에 없는 성도를 찾고 만드시는 것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4 벧전 2:2 신윤식 2022.04.30 205
13 롬 12:3 신윤식 2022.04.23 191
» 벧전 3:19 신윤식 2022.03.20 334
11 마 17:27 신윤식 2022.03.12 213
10 마 17:20 신윤식 2022.03.12 189
9 마 11:12 신윤식 2022.02.26 219
8 행 16:31 신윤식 2022.02.26 188
7 눅 19:9 신윤식 2022.02.26 171
6 창 6:3 신윤식 2022.02.07 221
5 히 6:4-6 신윤식 2022.02.07 232
4 왕상 3:28 신윤식 2022.02.07 185
3 딤전 2:15 신윤식 2022.02.07 226
2 창 4:7 신윤식 2022.02.07 287
1 창 3:10 신윤식 2022.02.07 328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