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7 16:00

시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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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42:1)

 

현대인의 일상은 바쁘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하는 일이나 직업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쨌든 일상생활에서 여유와 심적 평안을 누리기가 힘든 시대인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지 물질적 가치나 명예보다는 건강한 심신을 유지하는 삶을 행복의 척도로 삼고 추구하는 웰빙 붐이 일기 시작했고 웰빙족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하여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자리한 것이다. 이러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삶의 질과 연관되지 않은 주를 찾고자 하는 갈급함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주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으며 인간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없는 존재다. 이러한 주를 찾기에 갈급하려면 먼저 보이는 것에 마음 두지 않고 욕망하지 않아야 한다. 보이는 것을 욕망하는 마음으로는 결국 자기의 일을 돕는 주를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냇물을 찾는 사슴처럼 우리의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해진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누구도 보이는 것을 향한 욕망을 삭제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마음 둘 자질이 없기 때문이다.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갈망한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누가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과 같은 갈급함으로 하나님을 갈망할 수 있을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바쁜 일상으로 피곤하고 지친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기독교인이라는 명분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겨우 교회를 출입하는 수준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솔직할 것이다. 그런데도 교인들에게 시냇물을 찾는 사슴처럼 목마른 심정으로 주를 찾는 일에 갈급해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사실 듣는 사람도 답답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면 주를 갈망하며 찾는 믿음이 되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에서 목마름에 중점을 두게 된다. 성경에는 목마른 사슴으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목이 마르지 않고는 물을 찾을 다른 이유가 없기에 목마른 사슴으로 해석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래서 사슴처럼 주를 목말라하는 심령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 목마름이라는 상태가 인간의 의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인간은 돈에 목말라 한다. 그것은 돈을 힘과 행복의 조건으로 여기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고 죄의 속성이지 인간의 의지가 아니다. ‘내가 돈을 목말라해야겠다라고 마음먹고 실행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갈증 또한 물을 원하는 몸의 자연적인 반응이지 갈증의 상태가 되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주를 향한 갈망, 목마름은 인간이 마음먹고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본문은 목마른 사슴처럼 갈급함으로 주를 찾아야 한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내용이 아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가는 일에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시냇물이 있는 곳에는 위험도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슴만 시냇물을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약한 사슴에게 위협이 되고 목숨을 앗아갈 맹수가 있을 수 있고, 시냇물을 찾아가는 과정도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슴을 노리는 맹수를 피해서 가야 하는 길인 것이다.

 

 

그런데도 시냇물을 찾는다면 그것은 목마름으로 인한 갈급함 때문이다. 목이 마르지 않으면 가지 않고 찾지 않을 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물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기에 위험이 있다 해도 찾아가게 된다. 그래서 시냇물을 찾게 하는 것은 사슴의 선택과 의지가 아니라 목마름이 주는 갈급함이라는 것에 중점을 두고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42편의 저자가 처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다만 남쪽 유다가 망한 후 바벨론 포로 생활의 시기로 짐작할 뿐이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3)라는 말도 유다 백성을 향한 바벨론 사람의 조롱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쨌든 살아 계신 하나님이 믿는 자를 도우시고 지켜주시고 인도하시는 증거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통의 상황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저자가 갈망하는 것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다(2). 신자는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는데 굳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한다고 하는 이유가 있을까? 그것은 말한 것처럼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는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주변으로부터 네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있냐?’라는 조롱이 계속되는 가운데서 자신 역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수 없다면 참으로 답답할 것이다. 이것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자 하는 갈망으로 이어진다.

 

 

평안할 때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가?’라는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삶이 원하는 방향에서 벗어나 뒤틀려지고 고통이 되면 평소 믿고 알던 하나님과의 연결고리에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님을 고통이 아니라 평안을 주는 분으로 믿는 믿음으로는 고통에서 하나님이 삶에 개입하여 일하고 계시는 증거와 흔적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통과 절망의 상황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기를 갈망하게 하는 목마름이 된다면 고통은 오히려 갈급하게 주를 찾게 하는 도우심이 된다. 이러한 도우심으로 고통과 위험에서도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길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갈급함이 있게 되는 것이고 이 갈급함이 주가 계신 십자가를 찾게 한다.

 

 

 

고통과 절망도 자기 백성의 삶에 개입하여 함께 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게 하는 도우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비록 하나님이 어디 있으냐?’라는 조롱을 받는 처지라 해도 신자의 영혼은 낙심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는다. 다만 뜻을 세우시고 일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둘 뿐이다. 하나님은 목마른 사슴이 되도록 도우신다. 하지만 자신의 형편이 나아지는 것만 생각하면 목마른 사슴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이 아닌 자기에 대해 갈급해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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