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8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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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2:24)

 

성경에는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비기독교인에게도 친숙하여 자주 인용되기도 하는 구절이 많이 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본문도 그중의 하나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을 희생의 의미로 해석하고 세상에 유익이 되는 희생적 삶을 가르치는 교훈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목사가 이 본문으로 설교할 때도 어김없이 예수님을 본받아 희생의 삶을 사는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희생의 예로 자신을 녹여 어둠을 밝히는 양초와 자신을 녹여 맛을 내는 소금을 말하기도 한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하심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정신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땅에 떨어져 죽은 밀 한 알의 희생으로 맺어진 열매가 성도이기에 성도는 밀의 희생정신을 본받아 살면서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라는 해석이 세상이 알고 있는 선에 일치하기에 반박도 의심도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죽으면이라는 말에 부담을 느끼는지 실제로 죽는 희생이 아니라 죽을 각오로 하는 희생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성경에서 부담될 요소를 제거하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면서 예수님 말씀을 인간의 편리를 따라 제멋대로 편집해 버리는 것이 자기를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인간의 횡포다. 이러한 횡포로 말씀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고, 횡포를 부리는 그들이 오직 성경을 외치는 소위 성경 전문가라는 사실이 씁쓸할 뿐이다. 유대 사회에서 성경 전문가로 인정받고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부했던 바리새인이 예수를 죽인 것과 다를 바 없는 사태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자기를 위해서다. ‘먹으면 죽는다는 엄중한 말씀도 자기를 위하는 자기 사랑에 의해 죽을까 하노라로 변개 된다(3:3). 인간이 죽을 것을 염려해서 선악과를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사랑에 십자가의 도는 가려지고 예수를 보지 못하게 된다.

 

 

마귀가 하와에게 한 일은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말로 죽음에 안심하게 하고 눈이 밝아져 하나님같이 된다는 거짓된 선악과 효능에 마음을 두게 한 것이다. 이것이 마귀의 유혹으로 작용하는 인간의 자기 사랑이며 이러한 자기 사랑에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본받아 희생하는 제자의 삶을 살자는 말이 나오게 된다. ‘하나님 같이 된다라는 마귀의 말처럼 희생이 있는 사랑을 실천하는 인간 되는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다.

 

 

한 알의 밀 이야기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12:25)는 말씀으로 이어진다.

 

 

만약 한 알의 밀 이야기가 희생의 삶을 가르친다면 희생을 싫어하는 것은 곧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은 생명을 잃어버리는 결과가 된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자기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생명을 잃지 않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당장 타인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희생을 실천해야 할 판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20절에 보면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헬라인 몇 명이 등장한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게 된 헬라인, 즉 이방인으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들이 빌립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예수를 만나고자 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예수의 제자인 빌립을 선생으로 칭한 것을 보면 빌립의 스승인 예수님에게서 영생에 대한 가르침을 받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자기 문제 즉 자기 사랑으로 예수를 만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의도를 아신 예수님은 자기 사랑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것이 오히려 생명을 잃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부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묻는 일이 있다. 이 물음에서 드러나는 것은 영생의 길을 예수님과의 관계가 아닌 자신의 행함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기독교인이 알고 있는 믿음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으신 희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하늘로 가신 분으로 알고 있고, 구원은 자신이 그 예수를 믿어서 받는 것으로 생각한다.

 

 

예수님은 예수님으로서의 일을 하셨으니 믿는 자는 믿는 자로서의 일을 하면 되는 것인가? 이러한 믿음은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자신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집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 구원이며 그 관계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믿음을 자기 힘으로 가야 하는 것으로 알고 항상 자신이 잘해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진 상태에 머물게 될 뿐이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믿음의 실상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희생을 실천하셔서 세상으로부터 존경받고 영광 받는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자기 백성을 얻기 위함이다. 이것을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이 없다면 죽음으로 맺어진 열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 알의 밀이 죽어서 맺어진 열매는 이미 열매이기에 열매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물음이 필요 없다. 예수님의 죽음이 생명이 된 새로운 세계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매는 자기 구원을 위한 자기 사랑으로 예수를 찾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기에 생명을 잃는 것이 된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맺어진 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이 자신을 열매로 맺었음을 아는 신자라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기 사랑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죽음이 자신을 미워할 이유가 된 그가 열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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