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22 18:44

마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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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22:12)

 

성경은 우리의 상식에 도무지 맞지 않는 말을 한다. 그래서 성경을 제대로 보게 되면 기존에 단단히 구축되어 있던 상식이 하나하나 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을 간과하고 자기 상식에 맞춰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말씀의 의도에서 벗어난 인간의 말로 전락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여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결과가 된다.

 

 

교회를 찾아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의 주된 목적은 복과 구원이다. 그리고 이 목적을 이루는데 필수적인 조건으로 행함을 꼽는다.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행함을 통해서 믿음의 여부와 구원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인이 알고 있는 상식이다.

 

 

문제는 성경이 이러한 상식을 옹호하고 인정하느냐는 것이다. 만약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 거부당하고 지옥으로 던져지는 이유가 된다면 참으로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자기의 상식을 고집하며 성경을 보기 때문에 행함이 바르지 못한 것을 구원을 위험하게 만드는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로 바라볼 뿐이지 자신이 진리로 알고 있는 내용이 오히려 하나님께 진노가 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이것을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아 들어왔는데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손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져져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는 선언을 받은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생각해 보자. 이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두운 데에 던져진다. 즉 오직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 하나가 죄가 되어 지옥으로 던져진 것이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일상 삶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의롭다는 칭찬을 받을 만큼 바르게 살았을 수 있고 창녀와 세리들처럼 죄인으로 손가락질받으며 살았을 수 있다. 그런데 삶의 행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단지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옥에 던져지는 것부터 우리의 상식에 맞지 않는다.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가 입어야 할 예복을 성도의 옳은 행실로말하기도 한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19:8)라는 구절을 근거로 하는 말이다. 그리고 옳은 행실을 바른 신앙생활과 더불어 윤리와 도덕에 맞춰 해석한다. 결국 성도가 옳고 바르게 사는 일상생활이 천국에 들어가는 예복을 준비하는 삶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것이 성경을 인간의 눈높이에 맞춰 해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러한 내용이 전혀 없다. 오히려 자기의 옳은 행실로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그들이 예복을 입지 않은 자로 간주 되어 어두운 데로 던져질 것을 말씀한다. 왜냐하면 예복은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가 준비해서 입고 가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미 드러나 있다.

 

 

임금이 혼인 잔치를 베풀고 청한 사람들을 오라 하였으나 저마다 자기 일을 이유로 참석을 거절한다. 심지어 임금의 말을 전하러 간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자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 종들에게 네거리 길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는 지시를 내린다. 임금의 지시대로 종들은 악한 자나 선한 자를 구분하지 않고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와 혼인 잔치는 손님으로 가득하게 된다(22:2-10).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청함을 받아 잔치에 온 손님에는 악한 자도 있고 선한 자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단지 예복으로 인해서 어둠에 던져진 것이면 인간의 선함과 악함은 구원과 무관하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믿음에서 선한 행실이 나온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선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고집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이 세상의 상식과 함께하면서 그것을 진리로 여기는 인간의 미련함이다.

 

 

종들은 길에 나가서 사람들을 청하여 데려왔다. 이들은 혼인 잔치에 청함 받을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예복을 미리 준비할 수가 없다. 길을 가면서 임금이 베푼 잔치에 청함을 받아 갈 것을 예상하여 예복을 준비하여 길을 가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그저 자기 길을 가고 있었을 뿐인데 청함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예복의 출처는 잔치를 베푼 임금이라고 할 수 있다. 청함을 받고 잔치에 온 자들에게 임금이 예복을 주고 잔치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그런데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은 예복이 모든 사람을 하나가 되게 하는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 잔치에 온 사람들이 각자 다르게 입고 있는 옷을 덮어 버리고 모두 같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예복이다. 악한 사람들이든 선한 사람이든, 부하든 가난하든 예복으로 인해서 서로 다름이 덮이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예복에 불만이 있다면 그는 누구일까? 악한 자와 하나로 취급받는 것이 싫은 사람, 즉 자신을 믿음이 있는 선한 자로 여기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옳은 행실이 있고 믿음에 열심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행실이 옳지 못하고 믿음이 없는 악한 자와 하나로 취급하는 예복이 싫은 것이다. 이것이 예복을 거절하고 입지 않은 이유라 할 수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3:27)라는 바울의 말에 따르면 예복은 그리스도의 의로 해석된다. 악하든 선하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이 의로운 성도로 여김을 받아 천국에 있게 된다. 그래서 성도의 옳은 행실은 자신의 선한 행함이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자기의 의를 부인하게 되는 행실로 이해할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가 천국을 위해 준비해야 하거나 준비할 수 있는 예복은 없다. 오히려 자기가 준비한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 임금이 베푼 예복을 거절하는 것이다.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의 취지는 예복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예복을 입고 예복의 가치를 자랑하는 것이 임금의 뜻에 순종 되는 천국이다.

 

 

 

이들이 택함을 받은 성도이며 청함과 택함의 차이는 예복으로 드러난다. 자신이 준비한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다는 그들이 예복의 가치를 조롱하는 자들로 어둠에 던져지게 된다. 천국은 인간의 믿음, 사랑, 선함, 열심,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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