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29 18:59

눅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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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8:15)

 

기독교인의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되는 것 중의 하나가 말씀을 듣는 태도다. 살전 2:13절의 내용처럼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의 설교를 사람의 말로 들으면 그저 형식적으로 듣고 잊어버리게 되지만,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게 되면 깨닫고 순종하려는 적극적인 마음으로 실천하여 결실하는 결과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를 사람의 말로 듣는 것은 말씀을 마귀에게 빼앗기고 결실하지 못하는 악한 습관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여기는 태도로 강조한다. 이처럼 말씀을 듣는 태도 여부에 따라 말씀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생각으로 씨 뿌리는 예수님의 비유 역시 그러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말씀을 듣지만 마귀에게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기는 자가 있다. 들을 때는 기쁨으로 듣지만 시련을 당하면 배반하는 자가 있다.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 이 모든 것을 말씀을 듣는 태도가 잘못된 결과로 해석한다. 반면에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들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들었기 때문으로 말하면서 그것을 말씀을 듣고 결실하는 기독교인의 좋은 태도로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는 것은 말씀을 듣는 태도와 무관하다. 어떤 이는 말씀을 듣는 태도가 좋으면 지난주의 설교 제목과 본문, 설교 내용을 기억하게 된다고 한다. 과연 사람의 기억력이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좋은 태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가? 그렇다면 기억력이 감퇴할 수밖에 없는 노년이 되면 말씀을 듣는 좋은 태도는 사라지는 것인가?

 

 

성경은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를 증거 한다. 인간의 세계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말로 소통이 되지만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오직 하늘의 말, 즉 예수님이 세상에 남기신 복음으로만 소통된다. 따라서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는 것은 자기를 위한 말로 받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은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소통할 수 없는 말씀으로 받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을 듣는 좋은 태도와 좋지 않은 태도로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사고방식에 걸림돌이 없이 소통되는 말이기에 사람의 말로 받는 것이 된다. 결국 말씀을 듣는 태도를 기독교인의 중요한 덕목으로 가르치는 것이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것이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미련한 인간의 실상이다.

 

 

대개의 사람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밭에 관심을 둔다. 씨가 떨어져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좋은 땅을 천국에 합당한 신자의 마음 상태라 생각하고 자신의 마음이 좋은 땅인지 아닌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그리고 들은 말씀을 마귀에게 빼앗기거나 말라 죽지 않게 잘 지켜서 결실이 있는 좋은 땅이 되는 방법에 관심을 둔다. 이것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현실이다.

 

 

말씀을 듣는 태도가 좋으면 좋은 밭이 되어 백 배의 결실을 이루고 천국에 갈 수 있다면 당연히 말씀을 듣는 태도에 모든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설교를 들을 때 잡생각을 하지 않아야 하고 필요하다면 필기하면서 설교에만 신경을 써야 한다. 하지만 좋은 태도로 설교를 들었다 해서 결실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마음은 말씀을 받아서 스스로 결실을 이루는 좋은 밭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이러한 마음 상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유되는 씨가 뿌려지므로 드러난다. 그것이 말씀인 씨의 기능이다. 인간의 마음이 길가와 같고 바위와 같고 가시떨기와 같다는 것을 말씀이 떨어졌을 때 알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마귀를 이길 수 없다. 마음에 말씀이 떨어졌다 해도 그 말씀을 마귀로부터 지켜 빼앗기지 않을 인간이 없다. 말씀을 들을 때 기쁨으로 받았다 할지라도 그 기쁨의 상태를 시련을 당할 때도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이 없다. 또한 세상을 살면서 겪는 염려와 재물과 향락의 기운을 물리치고 말씀을 온전히 결실하게 하는 인간도 없다. 이처럼 말씀에 있어서 인간은 무능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말씀이 와서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 즉 밭의 상태가 예수님이 십자에서 피 흘려 죽으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준다. 결국 십자가를 증거 하는 일에 필요한 것은 씨를 받아 자신의 힘으로 결실하는 능력 있는 좋은 땅이 아니라 쓸모없는 무능한 땅이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증거 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좋은 땅은 자신을 말씀을 결실할 수 없는 쓸모없는 땅으로 여기는 것이다. 말씀이 마음에 떨어져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것이다.

 

 

좋은 땅은 말씀으로 새롭게 된다. 그리고 좋은 땅은 다른 땅과 비교하지 않는다. 다른 땅과 비교하지 않아서 좋은 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비교하지 않게 되는 것으로 좋은 땅이란 사실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좋은 땅은 정작 자신을 좋은 땅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땅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결실을 맺을 수 없다. 실패로 끝날 뿐이다. 문제는 실패를 실패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노력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막연한 헛된 생각에 갇혀 있다. 마귀에게 말씀을 빼앗기는데도 그것을 도무지 감지하지 못한다. 말씀이 자신에게 와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이다.

 

 

 

좋은 땅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말씀으로 된다. 열매를 맺는 것도 말씀이 떨어져 말씀이 하는 일이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말씀이 역사하는 현장으로 존재하면 된다. 말씀이 하는 일을 알고 말씀으로 감사하는 것이 우리를 신자로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에게 지키고 이루라는 의미로 주신 말씀은 없다. 나에게 떨어져 결실하는 말씀, 씨의 능력을 고백하게 되는 그것이 좋은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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