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05 16:32

신 2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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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28:13)

 

복과 저주는 성경의 중심 내용 중의 하나이기에 복과 저주를 잘못 이해하면 반드시 성경 해석에 중대한 오류가 있게 된다. 지금의 많은 기독교인이 벌은 피하고 복을 받기 위해서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도 복과 저주를 잘못 이해한 결과다.

 

 

성경 내용대로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자가 되고 싶어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행함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맞는 삶을 위해 힘을 쓰는 것이나 반대로 저주를 피하려고 하나님이 싫어하실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복과 저주를 잘못 이해한 폐해다.

 

 

하지만 세상 현실은 전혀 다르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삶이 복과 저주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대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복과 저주가 삶의 질적인 차이로 드러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믿는 자라 해서 모두가 복으로 간주하는 질적인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성경을 보면 마치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복으로 말하고 피하고 싶은 것을 저주로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라는 말씀이 그러하다. 세상에서 꼬리가 아닌 머리가 되고 아래보다 위에 있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욕망을 옹호하지 않는다라는 점을 생각하면 결국 문제는 성경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인간에게 있음이 분명하다.

 

 

먼저 복과 저주는 개인적인 것으로 해석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성경은 개인적인 복과 저주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복과 저주를 개인적인 것으로 말한다. 개인이 잘하면 복을 받고 잘못하면 벌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기에 복에도 차별이 발생한다. 개인의 행함이 모두 일률적이지 않으니 행함의 차이에 따라 받는 복도 다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신다는 복을 생각해 보자. 대개는 머리가 되는 것을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 높은 자리, 우월한 자리에 오르는 것으로 해석한다. 공부하는 학생이면 반에서 1등을 하고 직장인이면 회사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머리가 되는 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반에서 1등을 하든, 회사에서 최고가 되든 그 자리는 하나다. 그렇다면 머리가 되는 하나의 자리를 두고 믿음의 사람들이 경쟁해야 하는가? 결국 머리는 믿음의 실력과 행함에 따라 순차적으로 1, 2, 3등으로 정해져야 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저주도 같은 것이 아니라 차이가 있어야 한다. 단언컨대 성경에 이러한 복과 저주는 없다. 이 모든 것이 복과 저주를 개인적인 것으로 해석하기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오류다.

 

 

머리도 꼬리도 여럿이 아니다. 하나의 머리고 하나의 꼬리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라는 말씀을 각자 개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무엇보다 너를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이스라엘이란 집단이지 이스라엘의 백성 개개인을 지칭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복과 저주는 이스라엘이란 집단과 연결되어 있고 이스라엘이 복을 받는다면 그 이스라엘에 소속된 백성으로 복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복과 저주를 개인적인 것으로 해석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복과 저주는 개인의 행함이 아니라 소속의 여부로 결정된다. 따라서 하나님이 머리가 되게 하신 복의 사람에게 소속되는 것이 곧 머리가 되는 복에 참여한 바가 된다. 여기에 개인의 행함은 전혀 관계가 없다.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애당초 인간 개인의 행함은 복이 아니라 저주로 연결되어 있다. 이유는 누구도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복은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듣고 행한 자에게만 임한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복이 임할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다. 예수만이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과 저주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해석해야 하는 이유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에 복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것으로 증거된다. 따라서 저주는 그리스도에게서 단절된 상태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단절된 특징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행함을 근거 삼아 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생각하면 행함을 믿음으로 강조하는 것은 참으로 심각하다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세상이 추구하는 복과 저주를 넘어서야 한다. 부활의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복으로 세상의 힘든 삶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믿음과의 간격이 매워져야 한다. 삶의 현실이 어떻든 신자는 여전히 그리스도께 매인 복의 사람이라는 사실에 붙들려 있어야 한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한 복을 알지 못하여 자기 행함과 수고의 믿음으로 원하는 복을 채워 삶을 원하는 것으로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이 저주이며 꼬리에 속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복이 되는 세계에서는 그리스도의 공로만 인정된다. 인간의 행함과 공로로 인한 차별과 계급이 없으니 꼬리가 없다. 따라서 누구든 세상에서의 지위를 따져 자신을 꼬리로 생각하지 않아야 화는 것이 복의 세계다. 우리를 복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 부르신 것이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신 것이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신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는 꼬리와 아래에 해당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 위에 있고 아래에 있는가를 따질 이유가 없는 것이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다.

 

 

 

저주의 세상에서는 머리가 되든 위에 있든 그 운명은 저주다. 이러한 저주에서 구출되었다면 운명이 저주에서 복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으로 베풀어진 은혜다. 이 은혜를 복과 저주의 중심에 놓게 되면 자신의 행함을 중심에 놓고 복과 저주를 저울질하는 것이야말로 저주의 특성으로 드러날 뿐임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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