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07 12:09

고전 10:29

조회 수 146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고전 10:29)

 

우리의 일상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 중의 하나는 양심이다. 외국산을 국내산으로 속여 판매한 사업주에게 양심이 없다라는 댓글이 달리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 것처럼 양심은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적 바른 규범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기 이익을 위해 이 규칙을 어기고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면 양심이 없다, 양심에 털 났다라는 말로 비판한다.

 

 

양심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씨. 선악을 판단하여 선은 행하고 악을 따르지 않은 의식이 우리가 이해하는 양심이다. 이러한 양심에 가책이 된다면 악을 행했을 경우다. 선을 행하여야 한다는 의식과 다르게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선악 개념이 작동하여 잘못된 행위에 대한 비판과 반성과 자책을 하는 것이다.

 

 

때로는 이익을 포기하기 싫어서 양심이 밥 먹여 주나라는 말로 애써 양심의 가책을 덮으려고도 하지만 도덕적 의식이 있는 이상 자기 안에서 작동하는 양심을 회피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 혹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같은 행위의 반복으로 인해서 양심의 감각이 무디어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양심을 악이 아닌 선을 행하는 마음으로 이해하면서 기독교를 양심의 종교로 말하기도 한다.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나 선을 행하면서 말씀을 따르는 믿음 생활에 선악을 구별하는 양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양심에 거리끼는 일은 하지 않고 바르고 선한 행위가 있는 것을 믿음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결국 누가 더 양심적으로 사는가에 따라 믿음의 분량도 차별되는 것이 양심의 종교로 자처하는 기독교다.

 

 

성경도 양심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쓴 바울의 편지에 보면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라는 말을 한다. 남의 것, 즉 남의 양심은 성도 아닌 다른 사람의 양심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바울은 성도의 양심과 다른 양심을 구분한다. 양심을 두 종류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도의 양심과 성도 아닌 사람의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 성도라 해도 세상이 정한 도덕적 규범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양심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으로 해석하게 되면 성도나 성도 아닌 사람의 양심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바울이 양심을 둘로 나누는 것은 성도의 양심을 선을 행하고 도덕적 규범을 따르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도덕적 양심도 같을 수는 없다. 나라와 문화와 규칙과 법에 따라 양심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법은 청소년에게는 술 담배를 판매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이법이 도덕적 규범으로 자리하면서 청소년에게 술 담배를 판매하는 것은 자기 이익을 위한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로 규정된다. 하지만 이러한 법이 없는 나라에서는 청소년에게 술 담배를 팔아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이처럼 양심은 그가 속한 나라의 문화와 법에 따라 구축되고 습득된 것이기에 모든 사람에게 같다고 할 수 없다.

 

 

고린도 교회의 유대 기독교인의 양심은 율법에 따라 구축되고 습득된다. 그래서 그들의 우상 제물에 관한 양심은 당연히 먹으면 안 된다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신앙적 양심이기에 그 양심에 따라 우상 제물을 먹는 다른 성도를 믿음이 없는 잘못된 행위로 비판하고 판단한 것이다.

 

 

지금의 한국교회에도 우상 제물은 먹으면 안 된다가 신자의 양심으로 구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양심에 의해 신자가 제사 음식을 먹어도 되는가 먹지 않아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주일 지키는 것이 바른 믿음으로 정착된 양심에 따라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을 믿음이 없는 것으로 비판하는 것도 같은 경우다.

 

 

바울은 이러한 인간의 양심이 법이 되어 믿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성도의 양심이 아닌 남의 것, 남의 양심으로 구분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양심은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양심에 가책되는 잘못된 행동이 없으면 믿음으로 바르게 살고 있다라며 자신에 대해 당당해지면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죄인의 자리에 자신은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양심에 대한 잘못된 이해다.

 

 

성도의 양심은 인간의 죄인 됨을 아는 것이다. 이 양심은 인간의 마음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거나 학습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라 성령이 임하여 거듭난 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경은 도덕적 의미의 선함, 착함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어진 양심이란 의미로 선한 양심, 착함 양심으로 말한다. 이러한 성도의 양심은 자기의 죄인 됨을 알기에 서로를 판단하지 않는다. 이것이 성도가 양심 바르게 행하는 것이다.

 

 

인간의 양심은 늘 자기를 판단하고 정죄하며 어쩔 수 없었다는 자기변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잘못된 행동을 고치면 양심의 가책은 사라지고 대신 타인을 지적하고 판단한다. 그리고 지적을 받은 사람은 타인의 양심에 맞춰 자기 행동을 고침으로 믿음을 인정받고자 하는 현상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것이 저주 아래 있는 죄인이 아니라 바른 양심을 가진 선한 사람으로 예수께 나아가는 것이기에 성도가 아닌 남의 양심으로 말하는 것이다.

 

 

성도의 양심은 예수 안에서 자유롭게 한다. ‘우상 제물을 먹으면 안 된다라는 타인의 양심에 의해 비판을 받아도 먹어도 된다라는 자기 양심으로 충돌하지 않는다. 우상 제물은 아무것도 아니어서 먹어도 먹지 않아도 믿음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먹지 않아야 한다. 먹어도 된다라는 행위에 매이지 않은 성도의 양심이며 자유다.

 

 

 

먹으라하고 먹지 말라고 하는 바울의 말이 마치 번복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성도의 양심은 행위에 매이지 않은 자유임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바울이 먹으라 했으니 먹어도 된다라는 생각이라면 그것은 성도의 것이 아닌 남의 양심이다. 성도의 양심은 주의 피로만 향한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15 히 6:4-6 신윤식 2022.02.07 232
114 히 5:13 신윤식 2023.02.11 128
113 히 2:11 신윤식 2023.03.25 126
112 히 11:1 신윤식 2023.07.15 122
111 호 10:12 신윤식 2023.08.26 121
110 행 5:3 신윤식 2022.08.13 132
109 행 1:8 신윤식 2022.12.17 134
108 행 19:2 신윤식 2022.09.10 116
107 행 16:6 신윤식 2022.06.04 114
106 행 16:31 신윤식 2022.02.26 188
105 합 3:2 신윤식 2022.07.03 195
104 학 1:8 신윤식 2022.07.17 116
103 창 6:3 신윤식 2022.02.07 221
102 창 4:7 신윤식 2022.02.07 287
101 창 3:15 신윤식 2024.02.03 65
100 창 3:10 신윤식 2022.02.07 329
99 창 32:28 신윤식 2024.01.27 47
98 창 2:3 신윤식 2022.12.10 129
97 창 19:26 신윤식 2024.03.16 56
96 창 11:9 신윤식 2023.12.09 115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