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25 11:46

마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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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7:12)

 

기독교인에게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다. 그리고 좋은 것을 받기 위해 기도한다. 그렇다면 기도를 말하기 전에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 ‘과연 인간에게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분별할 안목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좋은 것을 알아볼 안목이 없는 상태에서 좋은 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달라고 떼쓰는 철없는 어린아이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7:7)라는 말씀도 우리에게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알아볼 안목이 있는가?’라는 전제하에 생각해야 한다. 무조건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질문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 때문이다(7:11).

 

 

하나님은 좋지 않은 것을 구하는 데도 열심히 구하는 정성이 갸륵해서 주시는 분이 아니다. 좋은 것을 구할 때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구하는 자는 반드시 좋은 것을 분별할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안목이 있는 자만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다.

 

 

따라서 인간에게 그러한 안목이 없다면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본인은 열심히 구하고 있다고 자신하겠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구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이 기독교인이 힘쓰는 기도의 현실이다.

 

 

우리는 자신이 처한 세상 현실에서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생각한다. 하지만 각기 다른 현실에 있기에 나에게 좋은 것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은 아니다. 우산 장사는 비 오는 것을 좋아하겠지만 염전에서 소금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해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자신의 현실과 입장에서 육신의 삶에 필요한 좋은 것을 생각한다. 이러한 안목으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알 수 없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말씀은 좋은 것을 분별할 안목이 없어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없는 인간의 현실과 연관해서 생각해야 한다. 본문의 그러므로라는 말이 앞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 한 절을 황금률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마치 기독교 윤리의 중심이 되는 뛰어난 도덕적 교훈을 가르치신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보고도 보지 못하는 소경의 상태를 드러낼 뿐이다.

 

 

본문을 대개 내가 먼저 남을 대접해야 남도 나를 대접한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교에서 가르치는 내가 먼저 남을 높여 대접하면 나 또한 좋은 대접과 배려를 받을 수 있다라는 인간관계론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다른 종교에서도 교훈으로 만들어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의 말씀을 하셨다는 것인가?

 

복음은 인간의 도덕과 윤리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생명의 말씀이다. 그것을 교회가 도덕의 수준으로 만들면서 스스로 성경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러한 사실에 둔감하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공동 번역에는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라고 되어 있다.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하라는 것이고 그것이 율법과 선지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남에게서 좋은 것을 바라는 대로라는 말을 단지 대우받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없는 좋은 것을 남이 해주기를 바란다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에게 없는 좋은 것을 받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런데 내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야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없는 좋은 것으로 남에게 해주라는 뜻이 된다. 결국 인간에게는 좋은 것이 없기에 좋은 것으로 남을 대접할 수 없다는 것이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의미가 된다. 남에게 대접받으면 너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이나, 대접받고자 하면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말과는 아예 다르다.

 

 

예수님은 좋은 것으로 남을 대접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고 그것이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는 말의 의미다. 율법과 선지자는 말씀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행할 수 없는 인간의 상태를 드러낸다. 좋은 것이 없어서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것이 없고 하나님이 받으실 것도 없다. 좋은 것으로 자기를 자랑할 수도 없고 남보다 우월하다고 드러낼 것도 없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로 증거되는 인간 됨이다.

 

 

그런데 좋은 것을 분별할 안목이 없기에 좋은 것을 가졌다고 착각한다. 이것이 유대인의 종교 사상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음의 의를 가졌다고 생각했기에 의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것은 육신을 위한 것이었고 당연히 기도도 육신을 위한 것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유대교의 정신을 따라 행하는 것이 현대 교회다.

 

 

남을 대접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이다.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예수님의 의에 속하게 하여 진노의 자식을 거룩한 성도가 되게 하신 것이 예수님의 대접이다. 따라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라는 말은 남을 대접하신 예수님이 남으로부터 대접을 받고자 하신다는 뜻이 된다. 대접받은 성도가 예수님을 대접해야 하는 것이다.

 

 

성도는 무엇으로 예수님을 대접할 수 있을까? 애당초 좋은 것은 없었기에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예수님을 대접할 수 없다. 결론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주신 좋은 것을 내어놓으면 된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용서와 의의 세계인 십자가만 자랑함으로 예수님만 높여지는 것이 성도로서 하게 되는 대접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대접받은 성도의 모임이다. 남에게 자랑할 수 있는 좋은 자기 것이 전혀 없는 자들의 모임이다. 오로지 예수님께 대접받은 피의 은혜를 감사하는 관계에서 서로 교통한다. 이것이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웃에게 행하게 되는 대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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