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1 11:25

요일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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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요일 5:16)

 

종교가 공통으로 말하는 신의 역할은 상벌을 주관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벌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게 되는데 그 원인을 당연히 인간에게서 찾는다. 인간의 행함이 원인이 되어 상벌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기독교 역시 이러한 종교성을 따라 상벌이 처리되는 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믿는다. 그래서 자기 행위를 스스로 판단하여 상벌 여부를 예측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상벌을 주관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맡긴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상을 위해 선한 믿음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또한 인간이 원인이 되어 유발되는 것은 상이 아니라 오직 죄로 인한 죽음뿐이라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에게 상은 없다. 죄로 인해 죽었다는 것이 인간의 전부일 뿐이다. 그런데도 인간을 선과 악의 원인자로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책임지고자 하는 지옥으로 이끄는 선악 지식이다. 이것이 인간의 공통적인 인식이며 이러한 인식으로 세워지는 종교는 결국 다 같다.

 

 

그런데 요한은 18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라는 말을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범죄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상을 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러한 시각이 요한의 말을 회피하게 만든다. 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해도 인간은 죄를 극복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의 말을 성도는 계속해서 범죄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바꾸기도 한다. 성도라 해도 죄를 범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것에 맞게 풀어가는 것이다.

 

 

그 근거로 16절의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라는 내용을 제시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성도가 범죄하지 않는 자라면 형제가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는 말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즉 요한은 성도라 해도 죄를 범할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고, 따라서 범죄하는 것이 없는 완전한 성도 됨을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을 성도는 범죄를 했으면 하나님께 회개하고 범죄의 행위로부터 돌아서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같은 죄를 계속해서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파는 헛된 노력일 뿐이다.

 

 

이처럼 인간에게 원인을 두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인가를 알아서 스스로 죄를 극복하려고 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에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믿는다라는 말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믿음은 우리의 어떤 행함도 상의 원인이 되지 않을뿐더러 구원에도 위협이 되지 않음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은 자신에게 원인을 두지 않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용서를 의지하게 한다.

 

 

구원의 원인은 예수님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는 것은 예수님의 행하심이 아니라 자신의 행함으로 구원을 확인하려는 불신앙이다. 이러한 믿음으로는 자기 자랑이 앞설 뿐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를 감사하지 않는다. 물론 말로는 감사하겠지만 마음은 자기 행함에 두고 있는 거짓이다.

 

 

인간은 용서 안에 있는 자와 용서 밖에 있는 자로 구분된다. 그리고 용서 안에 있는 성도는 어떤 죄로도 사망에 이르지 않는다. 그것이 용서의 효력이다. 그런데 왜 구하라고 하는 것일까? 용서 안에 있고 어차피 사망에 이르지 않을 죄라면 굳이 구하지 않는다 해도 구원에는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구하고 구하지 않는 것을 자기의 필요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망에 이르지 않은 죄를 범했는데 무엇을 구하라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있게 된다. 오히려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것을 보거든 구하라고 하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사망의 죄를 범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달라는 기도가 인간의 필요를 위해 구하는 것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구하라는 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구하면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주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뜻이다.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는 자기를 위해 구할 것이 없다. 예수님이 피 흘리심으로 자신의 전부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할 것이 없는 생명의 존재가 되게 하신 은혜로 감사하라는 것이 구하라는 참된 의미가 된다.

 

 

진노의 자식인 우리가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르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생명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불의가 죄지만 예수 안에서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다. 그런데 구하면 생명을 주신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사망에 이르지 않는 것이 이미 생명에 있다는 뜻인데 구하면 생명을 주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분명 모순이 된다.

 

 

13절을 보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성도가 자신에게 영생이 있음을 모를까? 영생이 있음을 모른 상태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이름을 믿는다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요한의 말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하지만 믿음은 영생이 있음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택한 자를 예수 안에 부르시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성도 되게 하셔서 영생을 알게 하신 것은 예수님의 피가 생명이 되었음이 증거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는 자신이 원인자가 되어서 자신을 책임지고자 하는 불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로 증거된 긍휼과 사랑을 멸시하는 것이고 예수에게서 멀어진 것이기에 모든 불의는 사망에 이르는 죄로 규정된다. 또한 이들은 오로지 자신의 필요를 위해 구할 것이기 때문에 구하라 하지 않노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구하면 생명을 주신다는 것은 불의한 우리가 어떻게 생명에 있게 되었는가를 잊지 말라는 뜻이다. 형제는 자신의 불의에서 함께 생명이신 주를 바라보는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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