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06 11:14

살전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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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살전 5:16)

 

우리를 기뻐하게도 하고 슬퍼하게도 하는 것은 결국 일상생활이다. 기쁨만 있는 일상도 슬픔만 있는 일상도 없다. 이것을 생각하면 항상 기뻐하라라는 사도바울의 말은 우리의 일상 현실과 어긋난다. 누구에게도 있을 수 없고 가능하지도 않은 일상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기독교인은 항상 기뻐하라라는 말씀대로 사는 것을 믿음으로 이해하고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뻐하려고 한다.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41:13)라는 구절처럼 힘과 위로가 되는 성경 구절을 찾아 읽으며 힘을 내고 기뻐하려고 애를 써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은 기쁘지 않아도 표정은 기쁜척하는 위선을 행하기도 한다.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뻐하지 않는 것이 과연 항상 기뻐하라라는 바울의 말을 실천하지 않는 것인가? 그런 것이면 바울의 말은 슬픔과 괴로움의 일상이라 해도 믿음이 있는 성도는 기뻐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 됨을 도외시한 억지일 뿐이지 복음이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바울 자신도 일상에서 항상 기뻐하지 못했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바울이 병들어 죽게 된 에바브로디도로 인해 근심하는 내용이 있다. 로마서 9장에서는 자신에게 큰 근심이 있다고 말한 것을 보면 바울도 모든 일상이 기쁨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상의 전부가 항상 기쁨이 되려면 근심, 염려, 슬픔, 분노 등 기쁨과 어긋나는 인간의 모든 감정이 사라지고 오직 기쁨의 감정만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인간은 없다. 때문에 항상 기뻐하라라는 바울의 말은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해석할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인의 문제는 자기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을 알지 못하고 오해하고 있는데도 극구 부인한다. 잘못된 믿음의 지식으로 자기 믿음을 자신이 책임지고 관리하려고 하기에 함정에 갇혀 헤어나지 못한다. 그 예가 항상 기뻐하는 것을 믿음의 삶으로 간주하고 기뻐하지 못하는 자신의 삶을 자책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믿음이 있고 강하다면 슬픔도 극복하고 기뻐해야 한다고 말한다. 안되면 기도하라고 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처럼 잘못된 믿음의 지식으로 항상 자기 믿음을 염려하는 것을 보면 결국 믿음을 방해하고 기쁨을 방해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없는 이유는 일상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 기뻐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항상 자기를 위하고 염려하면서 자기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 기뻐할 수 없는 이유다. 이미 기쁨이 되는 조건을 마음에 둔 상태에서 그것이 없거나 부족할 때 기뻐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내가 중심이 된 일상 안에서가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십자가의 세계, 예수 그리스도 안이다.

 

 

항상 기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조건은 그리스도의 피로 완성되었다. 즉 사도바울은 일상의 여러 문제로 슬퍼하고 근심하고 염려하며 사는 현실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름을 받은 성도의 참된 현실에 초점을 두고 항상 기뻐하라라고 말한 것이다.

 

 

비록 일상의 현실은 슬프고 괴로워도 성도는 다른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항상 기뻐할 수 없다라고 미리 결론을 내리는 것은 십자가의 세계는 외면하고 일상에 묻혀 사는 자기 처지에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설령 슬픈 일이 없다고 해도 평범한 일상에서 이유 없이 항상 기뻐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앞서는 것이다. 결국 항상 기뻐하라라는 말 한마디로도 우리의 일상이 십자가에서 멀어져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바울이 서신을 보낸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을 겪고 있었다.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그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하는 것은 환난을 현실로 보지 말고 완성된 기쁨의 세계인 그리스도 안에 부름을 받은 것을 현실로 보라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항상 기뻐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것이 교회의 참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입으로만 떠드는 십자가는 아무 의미가 없다. 예수님의 피로 완성된 십자가 복음이 기쁨이 되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예수 믿는 것을 이용하여 일상이 원하는 것으로 채워지고 그것이 기쁨이 되는 인생을 꿈꾸는 욕망과 연결된 가짜 십자가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것이 없는 믿음, 복음에 반발하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면 우리가 죄만 행하는 죄인이라는 전제하에서 이해해야 한다. 항상 죄만 행하는 죄인의 일상에서 기쁨이 되는 것은 모든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피가 유일하다. 다시 말해서 항상 죄만 행하는 죄인에게 예수님의 피는 항상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시는 기쁨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항상이라는 말은 우리가 실천하고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이미 이루어졌고 완성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항상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면 된다. 나를 위해 행하는 일상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일상이 죄고 그 죄를 항상 용서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이다. 그런 점에서 항상이라는 말은 우리의 잘못이나 허물을 책망하지 않는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세계에 잘하면 칭찬하고 잘못하면 책망하는 것은 없다. 이것이 십자가라면 예수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십자가에는 항상 우리의 죄를 가리시고 용서하신 은혜만 있기에 항상 기뻐하라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죄 가운데 있는데도 거룩한 성도가 되게 하는 피의 은혜가 항상 기뻐하게 하는 요소로 자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환난에서 슬퍼하고 괴로워하면서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가 기쁨이 됨을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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