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0 11:40

살전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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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뜻을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고 그 뜻을 이루시는 분 또한 하나님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인간은 개입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그 뜻을 이룰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교회는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에는 관심이 없고 믿음의 중심에 인간을 두고 해석하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라는 생각이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죄인데도 도무지 죄로 알지 못하는 사태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범사는 모든 일을 의미한다. 하지만 인간의 감사는 지극히 조건적이어서 범사에 감사할 수 없다. ‘범사라는 말 자체가 인간에게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항상쉬지 말고라는 말 역시 다르지 않다. 이처럼 인간은 조건적인 존재라는 사실이 벗어날 수 없는 한계로 작용한다. 그런데 이러한 한계를 무시하고 성경을 교인에게 적용하려고만 하기에 듣기에 유익이 될법한 해석이 양산되는 것이다.

 

 

현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어 긍정적인 사고를 하면 감사하게 된다라는 허망한 말이 그러한 해석에 속한다. 한마디로 사탄의 해석이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고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행세하는데도 그것을 알아챌 안목이 없다. 보고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며 결국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현실이다.

 

 

유튜브에서 보면 법륜 승려의 즉문즉설이라는 것이 있다. 개개인의 문제를 상담해 주는 것인데 한 뇌성마비 장애인이 자기가 어떤 잘못을 했기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는지를 묻는다. 이 물음에 법륜 승려는 뇌성마비라도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조금은 어눌하지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한다. 걸을 수 없어도 휠체어가 있어서 여기저기 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라고도 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는 왜 이런가?’라고 생각하면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라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항상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지만, 관점을 그래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면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장애인에게 답이 되었을까?

 

 

교회에서 하는 말과 도무지 다르지 않다. 이것이 인간의 선악 지식이다. 인간을 살리고 행복하게 하고 유익하게 하는 것을 선으로 규정한 지식으로 성경도 인간에게 유익이 되는 내용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석의 중심에 인간이 자리한다. 인간을 주체로 세우고 관점을 바꾸든 긍정적인 사고를 하든 자신이 하기에 따라 불행하게 살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을 주체로 하는 것이 사탄의 해석임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먼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너희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로 국한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가 의미하는 성도에게 당신은 어떻게 해서 예수 안에 있게 되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떤 답을 할까? 분명한 것은 자기가 행한 일의 공로와 업적은 나올 수 없다. 마음에 담고는 있으나 겸손을 위해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신의 것은 예수님의 의에 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해 버린다.

 

 

그리스도 예수 안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이루신 의의 나라이고 자신은 도무지 예수 안에 있을 수 없는 더러운 자임을 아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너희에 속한 성도다. 그래서 성도에게 범사는 한순간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삶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죄의 사건으로만 채워진다. 죄의 사건으로 인해서 죄가 드러나는 것이 우리의 처지에서 생각할 범사의 의미다.

 

 

그런데 죄의 사건은 죄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라는 바울의 말과 같이 은혜가 드러난다. 즉 죄의 사건은 죄를 깨닫고 죄인 임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고 의의 나라에 있게 하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만 성도를 위한 간섭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을 위한 간섭임을 주지해야 한다.

 

 

법륜 승려의 말처럼 걷지 못한다 해도 말할 수 있고 볼 수 있다는 것으로 감사하면 된다는 긍정적 사고방식을 믿음이라고 해보자. 하나님이 걷지 못하는 장애는 주셨지만 말하고 보고 먹고 마시고 숨을 쉬는 은혜는 주셨으니 그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굳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너희로 국한할 이유가 없다. 불교의 승려에게서도 나오는 삶의 지혜이고 마음을 편하게 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범사는 하나님의 사건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모든 범사는 하나님의 뜻이 개입되어 있고 그 뜻은 우리가 바라는 인생의 행복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가 은혜로 드러나는 것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부한 것도 가난한 것도 하나님이 개입하신 사건이다. 우리의 신앙 열심에 따라 베푸신 부함도 가난도 아니란 것이다. 부하든 가난하든 인간은 예수를 위해 살지 않는다. 끝까지 자기를 위한 인생만 생각한다. 이것이 인간의 저주에 속한 범사다.

 

 

이러한 우리의 범사에 자기의 피로 의를 이루신 예수님이 찾아와 동행해주신다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32:1)라는 다윗의 고백처럼 죄가 가려지고 의로운 자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성도로서의 범사가 된다. 이것이 감사의 이유가 되어 십자가만 자랑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용서하시고 예수 안에 있게 하신 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은혜답게 하시고 드러내기 위해서다. 이것이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다. 예수 안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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