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7 12:08

고전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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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고전 5:5)

 

성경은 인간의 관점으로는 해석할 수 없다. 물론 해석이야 하겠지만 인간에게 이해되는 말을 만들어내는 수준이다. 인간이 성경을 보는 관점은 항상 인간을 위한 구원으로 향하기에 인간이 이해하는 해석만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해석에 실패해야 한다. 인간의 관점으로는 도무지 해석되지 않는 실패를 경험해야 성경은 십자가의 관점이 아니면 해석될 수 없다라는 말에 공감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의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애초에 우리의 지식과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해되지 않는 성경 내용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보는 우리의 어떤 시각이 성경의 참된 의도를 알아가는 일에 걸림돌이 되는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고린도 교회에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음행이 있었는데 바울은 그 일 행한 자를 쫓아내지 아니한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게 하려는 것으로 말한다.

 

 

이러한 내용에서 대개의 사람은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악한 음행을 한 자가 구원 받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구원은 행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다고 하면서도 음행한 자의 믿음을 과연 참되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행함에 가치와 의미를 두고 판단하고 있는 우리의 실상이다.

 

 

바울은 십자가를 관점으로 교회에서 발생한 음행의 사건을 바라본다. 그러면 먼저 인간을 십자가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보자. 교회에 음행한 자가 있다면 당연히 음행한 자와 하지 않은 자로 나눠지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관점이다. ‘너는 음행했지만 나는 하지 않았다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의 관점에서는 음행이라는 행위와 관계없이 죄인이며 저주받은 자다. 우리는 이런 말에 익숙해져 있기에 당연하게 듣고 받아들인다. 그런데 정작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음행한 자의 영이 구원받는다는 내용이 뭔가 불합리하게 다가온다면 그것은 인간의 행함에서 구원의 자격과 자질을 찾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자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음행이 아니라 강도 살인자의 영이 구원받는다고 생각해 보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런데 바울은 음행한 자를 쫓아내지 않은 것을 책망한다. 마치 음행의 죄를 범한 자를 교회에서 쫓아내어 교회의 거룩함을 지켜야 하는데 그렇게 조치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십자가의 관점이 아니다. 교회에서 쫓아낸 자는 죄인이 되고, 반대로 교회 안에 있는 자는 음행하지 않아서 바르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자가 죄인이면 누구도 음행한 자의 죄를 물어 쫓아낼 자격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은데 바울은 무슨 이유로 쫓아내지 않았다고 책망하는지가 의문이다.

 

 

바울은 교회의 중요성을 십자가 용서의 은혜가 훼손되지 않고 지켜지는 것에 둔다. 그 말은 음행한 자를 쫓아내지 않은 것이 십자가 은혜가 훼손되는 것으로 본다는 뜻이다. 십자가 은혜는 죄로 인해 저주받은 자가 죄를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고 구원받았음을 감사하는 것으로 증거된다. 이러한 은혜가 음행한 자를 쫓아내는 것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음행한 자를 쫓아내라는 것은 죄를 용납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에 반드시 첨가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쫓아내는 자 또한 쫓겨나야 할 죄인이라는 것이다. 음행한 자를 쫓아내는 것을 통하여 음행하지 않았어도 음행으로부터 깨끗하다 할 수 없는 죄인임을 자각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자각 없이 음행을 벌주는 차원에서 쫓아내는 것이면 단지 교회를 악한 죄의 행위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바울이 의도하는 교회가 아니다. 바울은 음행이 없고 바르게 생활하는 교회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모든 자가 쫓겨나야 할 죄인인데 용서의 은혜가 교회로 모이게 하는 것에 감사하는 교회 됨을 생각한다. 죄를 용서하는 그리스도 피의 은혜가 중심에 자리한 교회 됨을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의 범죄 앞에서 자신 또한 같은 범죄가 나올 인간임을 자각하면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는 영과 함께 하지 못하고 쫓겨나야 할 존재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예수 안에 함께 하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범죄 한 자신을 매일 쫓아내는 것이 된다. 결국 범죄한 자가 있으면 그를 교회에서 쫓아내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예수 안에서 쫓아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교회에서 쫓아내고 사탄에게 내어주는 것을 교회법이 정한 출교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교회에서 출교 된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 그렇게 해석하면 출교 되지 않고 교회 안에 있으면 구원받는다는 의미가 된다. 무엇보다 출교는 인간이 정한 법에 따른 처분이지 하나님의 처분은 아니다.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 즉 음행한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은 주가 하시는 일을 말한다. 이 일은 지금도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다. 음행이라는 행위가 있는 자만 사탄에게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음행의 성격을 품고 살아가는 죄인 된 모든 인간을 사탄에게 내어주는 것이 주의 능력이며 주의 일이다.

 

 

사탄은 죄의 권세를 가졌다. 따라서 사탄에게 내어주는 것은 죄의 권세에 내어준다는 것이며 그것은 죄인 된 우리가 죄의 권세를 이길 수 없는 무능한 자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죄의 권세 아래서 육신으로 하는 모든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고 육신으로는 멸망 받을 수 없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 주의 능력으로 주가 하시는 일이다. 이것이 사탄에게 내주었다는 말의 의미다. 육신에 가능성을 두는 우리가 자신을 스스로 사탄에게 내주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신으로 자랑할 것은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가 용서의 능력이 됨을 믿는 영적인 존재로 함께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육신은 멸하고 영은 구원받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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