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17 11:15

욥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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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8:7)

 

종교는 인간의 선악 여부에 따라 복과 벌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종교성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초래한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우리의 일을 도와주시고 함께 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와 조건을 인간의 선함에서 찾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의 교회에서 거의 진리로 굳어져 있기에 자연히 자신의 선악 여부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현재 형편의 좋고 나쁨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판단한다. 이러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욥의 친구들이다.

 

 

성경은 인간을 진노의 존재로 규정한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죄만 있으며 복이 아니라 심판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하면서도 믿음을 선을 행할 수 있는 인간으로 변화되는 것으로 해석하기에 여전히 복의 이유를 예수 믿는 자신에게서 찾게 된다. 예수님이 복의 조건을 이루시고 복의 이유가 되심으로 그 혜택이 자신에게 무상으로 주어져 복 있는 자가 되었음을 증거하는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믿음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힘을 다해 그 뜻대로 살아가야 하는 열심으로 굳어져 있다. 그래서 믿음에는 자신의 열심, 정성, 선함, 노력, 의지 등등의 모든 것이 들어가야 하는 것으로 안다. 자신의 것이 들어간 정도에 따라 믿음의 질과 수준도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시작과 나중의 사이에는 점점이라는 의미가 존재한다. 점점 창대 하는 것이지 미약한 상태로 있다가 하루아침에 창대하게 되는 것을 염두에 둔 말이 아니다. 그래서 점점 창대해지기 위해서는 믿음 또한 자라가야 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고, 자라가기 위해서 인간의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라는 말과 일치한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복의 원칙이라면 세상의 복은 반드시 미약과 창대라는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믿는 자는 점점 창대 하는 결과를 보여야 하고, 만약 미약한 상태 그대로거나 창대하다가도 다시 미약해진다면 그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믿지 않는 불신자는 무엇이든 창대해지는 것이 없어야 한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미약의 상태로 존재해야 한다. 창대가 복이라면 믿는 자에게만 허락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해도 쉽게 드러나는 이런 모순을 알면서도 무시한 건지 아니면 도무지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인지 아리송하다.

 

그런데도 이러한 구절이 교회의 표어가 되어 강단 정면에 걸리고 가정이나 사업체에 액자로 장식될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을 보면 교회 스스로 성경에 무지하며 사탄의 하수인 노릇만 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현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한다. 그런데 정작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를 생각한다. 자신의 현재 상황에 이입하여 성경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개척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사업을 하게 되면 빌닷의 말이 마치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진리의 말씀인 것처럼 다가온다.

 

 

하나님이 욥의 친구 엘리바스에게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하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도 자신의 상황과 일치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간주해버린다. 마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라는 사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병에 걸린 사람은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라는 구절을 보면 마음이 동하게 된다. 그리고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33:3)라는 말씀과 연결하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병을 치료하여 낫게 하시는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주신다라는 식으로 병든 나를 위해 주신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경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은 예수는 무시하고 잊어버린 채 자기의 일에만 마음을 둔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무엇이 복음이고 무엇이 사탄의 말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상황에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고 생각되면 진리로 받아들이는 어리석음의 실상을 보여준다. 심지어 복음의 내용조차도 인간을 위한 것으로 해석하면서 자기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집착이 한없이 흘러나오는 것이 성경에 대한 인간의 시각이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3:17)라는 말씀대로라면 신자는 시작은 창대했으나 나중은 미약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창대하고 부요하게 되는 것이 복이 아니라 책망의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나중이 창대하게 되기를 바라는 열망으로 열심히 교회를 찾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음이 부요해진 듯한 착각에 빠진다. 말씀대로 살고자 하고 바르고 선한 삶을 위해 힘쓰면서 점점 믿음의 부족함이 채워지고 점차 나아지는 것 같은 환상에 붙들린다. 이것이 인간이 자기 욕구를 달성하기 위해 만든 다른 믿음의 헛된 길이다. 이 길에는 창대를 꿈꾸는 환상만 있을 뿐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미약한 자기 상태는 보이지 않는다.

 

 

 

성경은 십자가라는 길에서 참된 인간의 현실을 보게 한다. 이 길에서는 인간의 욕구도 환상도 꿈도 다 깨어진다. 그리고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현실로 깨어나게 된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에서는 인간의 창대는 없다. 다만 하찮고 보잘것없는 미약함만 있다. 그런데 길에 대한 구분이 없기에 길에 따라 인간이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대한 분별도 없다. 인간은 자신의 길에서 하나님을 말하지만, 성경은 십자가라는 다른 길에서 예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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