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01 11:56

눅 10:2

조회 수 11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10:2)

 

목사가 원하는 교인은 교회 일에 열심 있는 소위 일꾼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백성은 많아도 주님이 찾으시는 일꾼은 적다고 하면서 일꾼 될 것을 요구한다. 일꾼은 말만 하지 않고 몸으로 충성하고 봉사한다는 말로 교회를 위해 몸으로 일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특히 전도와 선교에 관심을 둔 목사라면 당연히 추수할 일꾼이라는 말을 강조하게 된다.

 

 

그래서 선교단체에서는 이런 구절을 자신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예수님이 칠십 인을 세워 각 지역에 보내시면서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하라는 말씀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선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추수에 필요한 일꾼, 즉 선교사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칠십 인을 세워서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는 이유가 예수님을 대신해서 사람들에게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인가? 그것을 추수로 말씀하신 것인가?

 

 

예수님이 각처를 다니시면서 말씀을 전파하신 것은 나를 믿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신 일이면 예수님은 자기 일에 실패했다고 해야 한다. 제자인 유다의 배신이 있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다른 제자들마저 두려움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에게서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칠십 인을 보내는 것이나 추수할 일꾼에 대한 말씀은 예수를 전하여 믿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추수는 농사꾼에게는 가장 마지막 과정이며 열매를 거두는 기쁨의 일이다. 그런데 곡식은 자신의 본래 자리에서 잘려야 한다. 씨로 뿌려지고 자라난 자리에서 잘려 주인의 창고로 들어가는 것이 추수다. 일꾼이 하는 일은 땅에 뿌리 내리고 있는 곡식을 잘라 주인의 창고에 넣어 주인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일꾼이나 곡식을 위한 추수가 아니라 주인의 기쁨을 목적으로 한다. 참된 일꾼은 이것을 아는 자다.

 

 

추수할 일꾼은 땅에 뿌리 내리고 있는 곡식을 잘려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세상에서 잘려지고 주인의 창고에 들어가는 것이 복이 되는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문제는 잘려지는 것을 거부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을 가라지로 말씀한다.

 

 

추수할 때는 곡식이 아닌 가라지도 함께 섞인다. 밭에는 곡식만 아니라 가라지도 함께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가라지를 뽑지 말고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하신다(13:30). 가라지는 곡식이 자라는 데 방해가 되기에 미리 뽑아야 유리하다. 그런데 추수 때까지 뽑지 말고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하신 것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곡식이 가라지로 오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죄로 인해 저주받은 하나님의 원수임을 깨닫고 자기 행함을 믿음과 의로 여기고 자랑한 것을 회개하고 예수님의 용서를 의지하고 감사하는 자가 주인의 창고에 들어갈 곡식이다. 그리고 가라지는 십자가 믿음을 말하기는 하지만 그 믿음을 자신의 행함으로 확인하고 자랑하는 자다.

 

 

이처럼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기준이 십자가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완성되기까지 가라지가 곡식과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하신 것이다. 따라서 추수 때까지’(13:30)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시는 십자가 사건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십자가에 시선을 두지 않으면 결국 인간에게로 시선이 향한다. 인간의 행함을 기준으로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그래서 곡식인데도 행함이 없다는 이유로 가라지로 취급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고, 이것이 십자가에 시선을 두지 않는 현대 교회의 실상이다.

 

 

십자가는 세상에 단단히 뿌리 박고, 그 뿌리가 넓게 퍼지며 많은 열매 맺는 나무가 되기를 원하는 우리의 욕망을 잘라버린다. 이것이 십자가로 선포되는 말씀이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는 세상에 뿌리 박고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심판의 말씀이 되는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 추수에 동원된 일꾼이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추수하는 일꾼의 의미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예수님이 칠십 인을 앞서 보내시는 것도 심판을 전하기 위해서다. 그래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하신다. 세상에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심판은 듣기 싫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원하는 것은 세상의 복으로 풍족해지는 것인데 그러한 믿음이 오히려 심판이 되며, 세상에서 잘려져야 한다는 말을 환영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만큼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세상으로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십자가를 전하는 말씀은 교회 부흥을 꿈꾸게 하는 전도도, 세계 곳곳에 교회를 세우는 선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는 것도 추수를 위한 일꾼에게는 말씀이 괴로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추수는 주인의 기쁨을 위한 일이지 일꾼의 기쁨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일꾼에게는 주인의 추수에 사용되는 영광과 함께 주인의 기쁨에 참여 되는 것이 보상이다.

 

 

십자가는 세상을 향한 인간의 모든 욕망과 희망을 헛된 것으로 드러낸다. 세상에서 무엇을 이루든 저주받은 자로 드러나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심판을 선포하며 심판에 있는 자기 백성을 십자가의 피로 건졌다는 것이 예수님의 전도다. 이러한 전도에 부르시고 보낸 자가 추수할 일꾼이기 때문에 이들이 할 일은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데 기준이 되는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다.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라는 말씀은 일꾼은 하나님이 보내심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즉 인간이 일꾼 되겠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일꾼이 되라라는 말은 인간에게 희망을 두는 것이며 이것이 가라지의 정신으로 드러난다. 일꾼은 자신이 심지 않고 자라게 하지도 않은 일에 주인의 기쁨을 위한 거두는 자로만 참여한다. 일꾼은 하나님이 보내신 성도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5 롬 10:10 신윤식 2023.07.08 112
» 눅 10:2 신윤식 2023.07.01 113
73 고후 13:5 신윤식 2023.06.24 111
72 욥 8:7 신윤식 2023.06.17 135
71 막 10:9 신윤식 2023.06.10 117
70 고전 5:5 신윤식 2023.05.27 139
69 살전 5:18 신윤식 2023.05.20 129
68 살전 5:17 신윤식 2023.05.13 125
67 살전 5:16 신윤식 2023.05.06 115
66 롬 8:28 신윤식 2023.04.29 113
65 요이 1:7 신윤식 2023.04.22 140
64 롬 15:1 신윤식 2023.04.15 118
63 계 16:16 신윤식 2023.04.08 118
62 요일 5:16 신윤식 2023.04.01 126
61 히 2:11 신윤식 2023.03.25 126
60 삿 14:14 신윤식 2023.03.18 135
59 신 30:11 신윤식 2023.03.11 130
58 사 41:10 신윤식 2023.03.04 113
57 마 7:12 신윤식 2023.02.25 143
56 사 7:14 신윤식 2023.02.18 10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