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2 12:02

갈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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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6:10)

 

인간에게 있는 모든 지식의 출처는 인간이다. 신에 대한 지식이나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의 출처 또한 인간이다. 따라서 이 지식을 토대로 성경을 해석한다면 당연히 오해와 오류를 피할 수 없다. 가령 우리에게는 착한 일믿음의 가정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지식이 있다. 착한 일은 선한 일을 하는 선행으로, 믿음의 가정은 모든 가족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가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지식이 바울의 말을 사랑과 섬김에도 순서가 있다는 의미로 보게 한다. 교회 안에 어려운 형편에 있는 믿음의 가정을 먼저 돕고 그 후에 교회 밖의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라는 순서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사실 바울은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연보한 일을 칭찬하기도 하고 교회에 성도를 위하는 연보를 부탁하기도 한다. 이러한 내용들이 마치 믿는 자들을 우선시하여 도울 것을 가르치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그래서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말처럼 착한 일을 인간의 친분이나 관계에 따라 순서를 정하여 행하는 일도 허다하다.

 

 

하지만 교회가 누구를 대상으로 구제하든 복음과는 무관하다. 만약 믿는 자를 먼저 돕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인의 편협성으로 보는 것이 옳다. 하나님은 인간을 교회 안의 기독교인과 교회 밖의 비기독교인으로 구분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흔히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간주하는 편협한 생각이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편협성을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독교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한 자기 백성만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식은 철저하게 어긋나 있을 뿐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 예수의 계시로 말미암았으며(1:11,12),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딤후 3:16). 이처럼 성경은 인간의 지식에서 나오지 않았기에 세상에서 배우고 경험한 우리 지식으로는 절대로 해석할 수 없다. 해석한다 해도 인간의 지식과 어울릴 뿐 성경과는 다른 길을 간다. 성경의 내용 하나하나가 우리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필히 요구되는 것은 세상에서 배운 지식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러면 바울은 무슨 뜻으로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고 말하는 것인가? 먼저 우리가 아는 지식을 따라 믿음의 가정을 기독교인의 가정으로 이해하면 곤란한 문제에 부딪힌다.

 

 

가령 가정의 구성원이 네 명이라고 했을 때 몇 명이 교회를 다녀야 믿음의 가정이 되는지의 문제가 있다. 가족 모두가 기독교인이어야 믿음의 가정이라면, 한 사람이라도 교인이 아닐 때 믿음의 가정에서 제외되고 결국 구제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야 하는 것인가?

 

 

육신의 관계인 가정은 혈육 관계라 해도 각자 개인으로 함께 한다. 평신도가 목자가 되고 소수의 인원이 가정에 모여 예배와 친교 등의 기능을 하는 가정교회를 표방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제아무리 좋은 뜻과 목적을 가지고 바람직한 조직으로 함께한다 해도 인간의 모임은 결국 개인으로 함께 하는 육신의 집단일 뿐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바울이 말한 믿음의 가정은 다르다. 믿음에는 개인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공로를 믿는 것이 믿음이기에 각자 개인의 의와 공로는 죽은 것으로 간주 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 믿음에 속한 관계가 믿음의 가정이다. 그렇게 보면 바울은 개인은 없고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 된 관계에 있는 믿음의 가정을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지식과 다른 점이다. 인간 지식의 중심에는 항상 나 개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하나 된 믿음의 가정에 인간의 행함은 없다. 인간이 행한 일을 믿음의 선한 실천으로 인정하고 칭찬하며 높이는 것이 없다. 자기가 행한 일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다만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님의 희생만 존귀한 행함으로 자리할 뿐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피로 새롭게 발생한 믿음의 가정이라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하늘의 지식이다.

 

 

예수님은 모친과 형제들이 있는 자리에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12:50)라고 말씀하신다. 육체로 이루어진 관계를 부정하시고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관계인 믿음의 가정을 말씀하신 것이다. 맏아들 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형제 관계가 구성된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가정은 개인의 행함이 아니라 중심이 되고 머리가 되신 예수님이 행하신 일 안에서 함께 한다. 따라서 믿음의 가정에는 우리가 행하거나 행할 수 있는 착한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착한 일로 규정되는 행함은 그 범위가 오로지 예수님으로만 제한되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한 착한 일은 자기의 선함을 나타내는 행함이 아니라 선하신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착한 일은 성령을 받음으로 죄를 알고 자기의 착함을 부인하게 된 성도에게만 가능하다. ‘기회 있는 대로라는 말의 의미도 성도에게는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이 예수님을 나타낼 기회로 허락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자기를 위해 산다. 이것이 변할 수 없는 저주에 해당한 인간성임을 알기에 자기 죄가 드러나는 모든 순간마다 예수님의 피를 높이게 된다. 이것이 성령이 행하게 하는 착한 일이다. 죄인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홀로 이루신 말씀의 완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참된 형제로 함께 하는 믿음의 가정이다.

 

 

 

성도에게 착한 일로 인한 성과는 없다. 말씀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선한 일의 성과만 있고 그 성과로 존재하는 것이 성도다. 그래서 성도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을 예수님이 이루신 선한 일의 증거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착한 일을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면서 자기의 죄를 확인하고 예수님의 공로만 높이는 형제로 함께 하는 그들이 성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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